엘리사 강해 (7)

헛수고를 하는 사람들

왕하 2:15-18

 

  1. 엘리야에게 역사한 영이 엘리사에게 내림

여리고에서 온 선지자 수련생들은 요단 강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엘리야가 자신의 겉옷으로 강물을 치며 엘리사를 데리고 요단 강을 건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강을 다시 되돌아 올 때에는 엘리야는 없고 엘리사만 엘리야의 겉옷으로 강물을 가르며 도강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기적은 대 선지자인 엘리야만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사에게도 동일한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된 선지 생도들은 엘리사에 대해서 두 가지를 인정하였습니다.

하나는 엘리야 선지자에게 역사하셨던 성령이 엘리사 위에 내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자신들의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사를 보고 자신들을 “당신의 종들”(16절)이라고 부르며 땅에 엎드려 그에게 큰 절을 하였습니다(15절).

선지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엎드려 절을 할 정도로 큰 감동을 받은 원인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기적이었습니다. 엘리사가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못하고 엘리야를 따라 다닐 때에는 누구도 그를 특별한 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엘리사에 대해서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야가 승천할 때까지 엘리사가 받은 여러 번의 테스트가 지닌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엘리사의 겉옷만 손에 쥐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엘리야의 겉옷을 손에 넣지 못하고 엘리사에게 빼앗긴 것을 아깝게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엘리야의 겉옷이 엘리사 손에 있는 한, 그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엘리사의 기적의 능력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조금 전만 해도 엘리사를 방관자의 눈으로 바라보던 그들이 이제는 아부에 가까운 큰 절을 하였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그들이 ‘경배’했다고까지 번역하였습니다. 단 한 번의 기적이 그들의 자세를 금방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엘리사가 그 동안 엘리야와 함께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와 그리고 요단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받았던 영적 훈련과 엘리야의 승천을 목격하면서 가졌던 비상한 영적 체험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기적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도 영적 실체로부터 눈이 멀게 합니다.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는 곳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치유의 은사가 어디에서 왔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병만 나으면 되니까요. 그런 사람들은 사탄이 병을 낫게 해 준다고 해도 굳이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치유의 은사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역자들의 발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엎드립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무리들이 주님의 기적 자체에 눈이 멀어서 병고치고 공밥까지 얻어 먹으려고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세워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다 해결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하였고 나중에는 주님 곁을 떠났습니다(요 6:14-15, 26, 66).

물론 엘리사의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럴지라도 기적 자체가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서는 안 됩니다. 기적 뒤에 가려진 구원의 메시지를 읽을 수 없으면 현상적인 것에 모든 가치를 두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영원한 가치와 ‘오는 세대’의 실체를 붙잡는 하나님의 종들에 의해서 전진해 나갑니다. 엘리사는 그런 사역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1. 엘리야를 찾는 어리석은 열심

여리고의 선지자 수련생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얄팍한 상태였는지는 그들이 엘리사에게 엘리야 선지자 수색 대원을 조직하자는 제안에서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에게 용감한 사람 오십 명이 있으니 청하건대 그들이 가서 당신의 주인을 찾게 하소서…”(16절).

이들이 왜 이런 엉뚱한 제안을 하였을까요? 그 원인은 그들이 엘리야의 승천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선지 생도들은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일시적으로 어디로 데리고 가신 줄로 알고 수색대를 보내자고 엘리사를 졸랐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 열심이 충일합니다.

이들은 산이든 골짜기든 샅샅이 다 뒤져서 찾아 내겠다고 호언하였습니다. 자기들에게 오십 명이나 되는 용감한 수련생들이 있다고 내세웠습니다. 자신들의 실력을 보여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에 대한 열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열심은 겉으로 보면 매우 가상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을 모르고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열심은 자신의 능력과 열정으로 채워진 육적인 에너지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용감하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숫자가 많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골짜기와 산들을 뛰어다닐 수 있는 힘이 넘칠지라도 바르게 인도되지 않은 열심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2) 자기 고집대로 행합니다.

엘리사는 그들에게 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강청하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엘리사는 하는 수 없이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강청을 좋게 보아서가 아니고 그런 옹고집은 낭패를 당해 보아야 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사의 종이라고 스스로 자칭하며 그 앞에 엎드려 절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승이라고 모신 엘리사의 말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엘리야 선지자의 성령이 엘리사 위에 머물며 역사한다고 인정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엘리사의 말을 듣지 않고 승천한 엘리야를 계속 찾겠다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엘리야의 사역이 엘리사에게 넘어온 것을 인정하지 않는단 말일까요? 이제부터는 엘리야가 아닌 엘리사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스라엘의 선지자로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었을까요? 엘리야의 겉옷을 엘리사가 가진 것을 그들도 보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그들이 엘리야를 찾겠다는 것은 다분히 육적인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사라진 엘리야 선지자를 어디서 찾게 된다면 그 공로와 자랑은 하늘을 찌를 것이었습니다. 엘리야와의 밀착된 관계는 그들에게 큰 권위를 부여해 줄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엘리사까지 자기들이 모실 수 있기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완벽한 권위와 전통을 세우게 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최고의 여리고 신학생들이 될 것이기에 그들의 장래는 보장되고도 남았습니다. 누군들 그런 신학교의 학위를 원치 않겠습니까? 이들은 엘리야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엘리사가 분명하게 성령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데리고 하늘로 가셨다고 말해도 전혀 곧이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온 산과 골짜기를 뒤져서라도 반드시 엘리야 선지자를 찾아 모셔 와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엘리야가 승천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엘리사의 말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또 엘리야의 겉옷이 엘리사의 손에 넘어왔다는 사실에도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듯합니다. 더구나 자기들 입으로 엘리야에게 역사했던 성령의 사역이 엘리사에게 옮겨왔다고 인정했으면서도 이것을 엘리야의 승천 이벤트와 연결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혈기를 믿음이라 착각하며 자기 뜻대로 엘리야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 듯이 고집하였습니다. 일단 자기 힘을 믿으면 진리보다 더 강해지려고 합니다. 이들은 사흘 동안 온 산을 두루 다니다가 헛탕을 치고서야 포기하였습니다. .

  1. 영적 스승에게서 배우는 것은 무엇입니까?

선지자 수련생들은 분명 엘리야를 크게 존경하였습니다. 그들은 엘리야의 승천을 받아 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엘리야는 승천해서는 안 될 존재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엘리야의 제자라는 배경이 중요하였습니다. 엘리야를 그들의 멘토로 내세우는 것은 그들의 신분 상승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엘리야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엘리야의 참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야와 가까이 동행하지도 않았고 그로부터 아무런 테스트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일은 엘리사가 도맡아서 하게 하고 자기들은 방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나타나서 본인들의 유익을 위해 필요한 것들만 챙기려고 했습니다. 영적 스승의 이름만 빌리는 것은 참 제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선지자 수련생들은 엘리야의 사상과 삶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엘리야의 신분과 영향력만 이용하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영적 멘토들을 가진 자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을 존경하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 신학을 전공한 신학자들도 많고 입만 열면 바울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신학적 깊이를 좋아하는 것과 바울의 삶을 닮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바울을 좋아한다고 하면서 바울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울 신학의 연구로 박사가 되어도 바울이 평생을 바친 선교 사역에 전혀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존경하는 스승의 인격과 희생의 삶에는 입술로만 찬사를 보내고 자신들의 삶에서는 작은 흉내도 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과 이타적인 사랑의 삶은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신자들까지도 진리와 십자가의 길을 따라 신실하게 살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우리에게 엘리야나 엘리사와 같은 영적 멘토들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관심이 고작해야 그들에 대한 정보를 갖는 것에 불과하거나 입술만의 찬사에 그친다면 무익할 따름입니다. 더구나 그릇된 동기와 열심으로 스승을 위한다고 발벗고 나서는 경우라면 결과적으로 에너지만 낭비하고 낙심합니다. 우리들도 여리고의 선지자 수련생들과 같은 자세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목회자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 교회당을 짓고 사람들을 동원시킬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주님의 일에 동참한다고 하지만 동기와 목적이 주님의 사상과 방식에 역행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세워주시는 권위

엘리사는 그들에게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18절)고 힐책하였습니다. 선지자 수련생들의 행위는 부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엘리사의 권위를 세워주는 계기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 자들에게는 자신의 권위나 결백을 억지로 세우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가 되면 진실이 드러나고 영적 권위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여리고의 수련생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권위를 무시한다고 노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엘리야와의 특별한 관계를 자신의 경력에 대한 권위로 내세우거나 엘리야의 승천을 목격한 유일한 증인이라고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한 여호수아와 엘리야의 영성을 따라 자신도 요단 강을 좌우로 갈라지게 한 사람이라고 호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차라리 무시를 당하고 져주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사가 엘리야의 겉옷을 쥐고 요단 강을 가르는 기적을 행한 후에 외부로부터 받은 첫 번째 시험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시험에도 승리해야 하지만 사람들로부터 받는 여러 형태의 시험에도 이겨야 합니다. 엘리사는 이 새로운 시험에서도 이겼습니다. 강압적인 권위로 이긴 것이 아니고 양보와 인내와 겸손의 미덕으로 이겼습니다. 오십 명의 용감한 사람들은 내 주변에 항상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과 작전을 손에 쥐고 나를 밀어 부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종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을 때에도 위의 것을 바라보며 삽니다. 하늘의 실체를 본 자들은 땅의 일들로 인해 쉽게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권위라면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전혀 해를 입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은 진리는 외부의 평가나 인정에 따라 그 진위가 좌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불병거와 불말과 회오리 바람은 하나님 나라의 실체들로서 손상 없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주의 자비하심 속에서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엘리사의 영적 권위를 오랜 사역 기간 동안에 반복하여 입증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감히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엘리사의 영적 권위를 무시하거나 도전할 자가 없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섭섭해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영적으로 엘리야로부터 받은 훈련이 있고, 그의 승천을 목격한 영적 차원의 체험이 있으며, 엘리야의 겉옷이 내 위에 떨어진 하늘의 소명이 있다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자녀들을 엘리야 시대의 칠천 명처럼 위기 때에 숨기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때가 오면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담대하게 나서서 ‘오는 세대’의 역군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발전을 위해 가치 있는 기여를 하게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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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리아 위클리 Apr. 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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