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 강해 (6)

요단 강을 어떻게 건너야 하는가?

열왕기하 2:8-14

 “엘리아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14절).

엘리야가 없는 상황에서 넘치는 요단 강을 엘리사가 혼자 다시 건널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손에는 엘리야의 겉옷이 쥐어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모든 테스트를 통과한 자로서 엘리야의 겉옷을 믿음으로 적용해야 하는 현실에 직면하였습니다. 믿음에는 정도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기 발 앞에 떨어진 엘리야의 겉옷을 주울 믿음이 없습니다. 어떤 이는 주운 엘리야의 겉옷으로 요단 강물을 칠 믿음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엘리사처럼 엘리야의 겉옷으로 요단 강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강물을 치고 건넙니다.

하늘의 실체를 보는 것은 찬란한 기쁨입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변화산에서 하늘의 실체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오는 세대’의 영광으로 빛나는 주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막 9:5) 초막을 짓고 그냥 살자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강물이 넘치는 요단 강의 현실로 내려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이 바랐던 기독교는 무사안일  종교였습니다. 아무 하는 일도 없이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변화산의 무드에 젖어  경건한 척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산 아래 평지에는 귀신 들린 아이가 입에 거품을 품고 이를 갈며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변화산의 영광을 목격한 자들은 평지로 내려와야 합니다. 불수레와 불말을 본 자들은 죄 많은 땅의 현실로 돌아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엘리야의 겉옷을 붙잡은 자들에게는 할 일이 있습니다. 그들은 요단 강을 가르고 건널 수 있게 하는 하늘에 속한 능력이 어떤 것인지를 이 죽어가는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요단 강은 언제나 넘치는 공포의 강입니다. 요단 강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적개심에 불타는 도전장을 내밉니다. 요단 강이 갈라지고 마르지 않으면 도강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요단 강은 엘리야의 겉옷이 없이 자신의 능력으로 건너보려고 만용을 부렸던 많은 사람들을 수장시킨 익사의 강입니다.

그럼 엘리사가 요단 강 가에서 엘리야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외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엘리사도 요단 강의 도전과 위협 앞에서 두려워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가 엘리야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한 것은 하나님이 계신 소재를 몰라서 물은 질문이 아닙니다. 이 말은 엘리야를 통해서 역사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이 현장에 계신다는 사실을 드러내시라는 믿음의 요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주님을 섬기고 따를 자들을 이런 방식으로 부르십니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길갈에서 시작한 걸음을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볼 때까지 신실하게 따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엘리야의 겉옷은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능력의 겉옷을 원하는 자들은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위험과 고난이 와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볼 때까지 주님 곁에 서 있습니다. 요단 강이 갈라지는 것은 요단 강물을 엘리야의 겉옷으로 치는 자들에게만 일어납니다. 엘리야의 겉옷을 손에 잡았다는 것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능력을 체험하려면 내가 받은 하늘의 은사들을 믿음으로 필히 적용해야 합니다.

[성령의 즉각적인 효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에게는 확신과 담대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멀리 서 있는 오십 명의 선지자 수련생들이 보는 앞에서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요단 강을 쳐서 좌우로 갈라지게 하는 담대함을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대 스승이 해 내었던 일을 홀로 행할 만큼 새로운 소명과 믿음의 확신으로 불타고 있었습니다.

성령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동일한 확신과 담대함을 줄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의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유대 관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주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담대함은 성령이 주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자신감과 다른 것입니다. 자신감은 나를 믿습니다. 자신감은 자기를 과신하기 때문에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는 맹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리고의 선지자 수련생들은 자신했기 때문에 엘리야 선지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십 명의 용감한 사람들을 과신하였습니다(왕하 2:16). 그러나 그들은 엘리야의 행방을 완전히 오해하고 부질 없는 에너지만 소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에서 자신감은 실패의 선봉입니다. 그러나  담대함은 자신에 대해서 자신하지 않습니다. 이 같은  겸비의 정신은 자신의 능력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엘리사는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확신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늘의 실체를 보았고 엘리야가 가진 능력의 원천을 직시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가 요단 강을 건넌 비결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문자적인 의미에서 엘리사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불병거나 불말들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실제로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늘의 실체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지금도 우리에게 계시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엘리야의 겉옷이 떨어진 것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는 성령의 검(劍)인 성경 말씀을 통하여(엡 6:17) 지금도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강력한 역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성도들의 삶 속에서 지금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령은 연약하고 두려움이 많은 자들을 말씀을 통해서 담대하게 만듭니다. 성령은 부족한 자들에게 필요한 은사를 부으시고, 약한 의지를 굳세게 해 주시며 각자의 소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엘리야는 떠났지만 그의 사역은 엘리사에 의해 중단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을 집어 들고 요단 강으로 돌아가서 엘리야가 한 대로 강물을 치며 건넜습니다. 이것은 그의 사역이 엘리야의 사역과 연결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일꾼은 바뀌었지만 일 자체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일꾼이 바뀐다고 해서 정지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엘리야가 없어도 우리는 ‘오는 세대’의 비전 속에서 성령의 능력에 의존하여 주님을 위해 큰 일을 계속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들은 훌륭한 기독교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우리들의 위대한 믿음의 선열들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있지 않습니다. 현재 생존한 우리들의 영적 멘토들도 때가 되면 세상을 떠납니다. 그들의 자리를 맡으려면 우리들의 부족을 통감합니다. 그들의 겉옷은 우리들의 영적 사이즈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 말고 엘리사처럼 하나님을 확신하고 그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구속의 역사를 통해 수많은 승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들의 삶을 통해서 강력하게 역사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모세와 사무엘과 다윗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루터와 칼빈의 하나님이시며 웨슬리와 휫필드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경건했던  청교도들의 하나님이시며 복음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수많은 순교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도 모두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야고보는 엘리야 선지자도 우리들처럼 연약한 본성을 가졌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증언하였습니다(약 5:17-18). 지나간 세대의 여러 훌륭한 믿음의 선열들치고 실수를 하지 않거나 두려워하지 않은 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풍성한 영적 체험을 통해 강하게 하시고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연약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능력은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겉옷이 떨어지게 한 여호와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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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위클리  03. 2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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