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2:19-22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19절).

 

엘리사는 엘리야 선지자와는 달리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심판보다 치유 사역으로 두각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여리고의 수질이 나쁜 물을 정화시켜 공동체가 안전하게 마시고 수확을 거두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게 하였습니다(21절). 이로써 엘리사의 사역은 실생활의 필요를 해결하는 문제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을 실제적으로 증거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엘리사의 많은 은혜로운 기적의 사역들이 연속되었습니다. 그의 치유 기적은 그의 사역의 성격을 요약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갖는 치유 사역에 대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처럼 엘리사도 구두 메시지보다는 행동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였습니다. 특히 그의 기적들에 대한 진술 속에서 우리는 많은 교훈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여리고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여리고는 자연적인 위치나 조건으로 보면 이상적이었습니다. 땅은 비옥하였으며 공기도 맑고 여러 종류의 방향목들의 향기로 채워졌습니다. 그래서 오랜 옛적부터 여리고는 인기가 있는 곳이어서 건축이 발달하였고 경제 활동이 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여리고 성읍의 생명선인 물이 알지 못할 이유로 오염이 되었습니다. 물이 생명과 신선함을 주기 보다는 흐르는 곳마다 질병과 죽음을 마시게 하였습니다. 오염된 물을 마신 임신부나 동물들에게 유산(流産)이 많았고 죽는 사람들도 많아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름답게 건축된 여리고는 그대로 가면 버려야 할 위기에 놓였습니다. 아무도 이를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독의 근원도 알 수 없고 해결 방안도 없었습니다(19절). 경건한 사람들은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파괴했을 때 재건을 못하도록 저주한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저주가 크게 임했다고 염려했을 것입니다(수 6:26).

  1. 인간 문화란 무엇입니까?

인간 문화는 간단하게 말하면 편리와 이윤의 추구이며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활동입니다. 문명은 매우 좋은 것들을 낳습니다. 상업과 지식, 법과 질서, 자유와 예술, 스포츠와 레저(leisure) 산업, 기타 사회 생활을 위한 여러 시스템의 발전을 제공합니다. 여리고 성처럼 위치는 편리하고 시설도 좋습니다. 그러나 인간 문명은 위험합니다. 문화적 발전을 이루는 과정에서 환경 파괴, 자연 고갈, 공해 조장, 노동 착취, 이윤 증대를 위한 불의한 경쟁, 세력 다툼, 물욕의 증가, 부도덕 등의 병폐가 거의 필연적으로 따릅니다. 경제 활동의 발달로 창출되는 부의 확장은 부패를 심고 탐닉을 살포하며 향락과 사치를 일으키고 부도덕을 확산시킵니다. 눈부신 외적인 발전 속에 만연한 부패와 타락은 역사가 증명합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를 보십시오. 1차, 2차 대전을 비롯한 대규모 전쟁을 비롯하여 현재까지 계속되는 국가들의 분쟁과 테러 집단은 고도로 발달한 문화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살상 무기들을 사용합니다.

인간 문화는 마음이 부패한 인간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죄의 문제와 무관하게 발전될 수 없습니다. 마약 조직, 뇌물 문화, 세계적인 도색 산업, 납치, 학살, 극심한 빈부의 차이 등등 헤아릴 수 없는 불행이 날마다 일어납니다. 여리고처럼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집니다. 죄의 세력이 꺾이지 않는 한, 인간 문화는 항상 고통스런 문제들을 안고 진행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해결책은 어디에 있을까요? 한마디로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리고 사람들이 엘리사 선지자에게 눈을 돌린 것은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첫째, 여리고 주민들이 엘리사를 찾은 것은 인간의 능력에 한계를 느끼고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엘리사는 수질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여리고 주민들은 오염된 물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자기들이 가진 모든 지식과 자원을 동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도 효과가 없자 손을 들고 엘리사를 찾아 왔습니다. 엘리사 개인을 믿었다기 보다는 그의  뒤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세상의 문제 해결은 궁극적으로 전문가들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정치 전문가, 경제 전문가, 사회 전문가, 교육 전문가, 군사 전문가, 심리 전문가, 의학, 공학, 예술, 스포츠 등등의 전문가들이 인간들의 근본적인 부패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여리고의 물처럼 각 방면의 전문가들을 포함하여 인간 각자의 영혼의 샘물이 오염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습니다. 여리고 주민들이 엘리사를 찾아간 것은 이 점에서 해결 방향을 바로잡은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부패한 역사는 항상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애써 왔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죄에 물든 인간의 마음을 고치지 못합니다. 마음이 썩어 있는 한, 인간 사회는 언제나 썩어 있습니다.

둘째, 여리고 주민들이 엘리사를 찾아 온 것은 그들이 더 이상 바알 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바알 신은 농경신이었습니다. 가나안 백성들은 바알 신이 비를 내리게 하여 농사가 잘 되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바알 신에게 흠뻑 빠졌습니다.

엘리사보다 앞서 간 엘리야 선지자의 개혁은 이러한 바알 종교의 속임수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의 사역은 이스라엘 국가 전체를 당대에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는 역부족이었지만 적어도 여리고 시민들의 경우에는 열매를 맺은 셈이었습니다.

거짓 신을 따를 때에는 하나님의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바알 신이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영적 눈을 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인정을 받지 못하고 드러날 수 없는 까닭의 하나는 백성들의 눈이 바알 신이 약속하는 물욕의 충족과 육욕의 만족에 쏠려 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 주민들이 엘리사에게 대표들을 보내서 자기들이 직면한 가장 급박한 생존 문제를 풀어 놓고 도움을 청하게 한 것은 그들의 영적 눈이 뜨였다는 증거입니다.  한 세대 전에만 해도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들이 박해로 피신을 다녀야 했고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숨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호와의 선지자가 인정을 받고 백성들은 공적인 문제까지 가지고 와서 자문을 청하였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북미의 일부 영성 운동이 수입되어 유행입니다. 그럼 영성의 능력이란 어떤 것입니까? 자신의 심리 현상을 잘 파악하고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것입니까? 개인의 경건 생활을 위해서 고안된 자기 개발이나 묵상 테크닉입니까? 아니면 종교적 낭만주의의 한 새로운 방법론입니까? 영성의 능력은 자신의 내면 세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신령한 능력이 없는 영성은 심리적 안정이나 정신적 만족을 위한 인간적인 시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된 영성은 인간의 절박한 죄의 문제에 열쇠를 제공합니다. 엘리사의 영성은 여리고 주민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긴급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공급처로 확신하고 달려 오게 하였습니다. 참된 영성은 죽어가는 자들에게 빛과 생명의 통로가 되는 자원과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뒤에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가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을 정도로 영성이 비칠 때에 비로소 이웃과 사회를 위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여리고 시민들은 엘리사의 그러한 영성을 인정하였기에 그를 신뢰하고 찾아 왔습니다.

  1. 여리고의 상황은 지금도 세상에 편만한 필요를 대변합니다.

여리고 성읍은 겉으로 보면 풍성하고 안정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죽음의 물줄기가 사방으로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외면은 반드시 내면의 실체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면은 내면의 부패를 가리는 가면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자연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이 우리들의 시야에 가득하지 않습니까? 하늘에 수놓은 빛나는 뭇 별들과 창공에 지고 뜨는 해와 달, 땅 위에 사는 각종 생물들의 지혜와 바다 속의 신비를 누가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인간의 안락과 즐거움을 위해 만들어진 것들로 가득합니다. 추위와 더위를 잊고 살 수 있는 전천후 주택, 무서운 질병들을 치유할 수 있는 의학의 혜택, 편리한 교통 시설,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각종 전자 제품, 각가지 예술 상품, 멋진 휴양지, 그 외에 돈으로 살 수 있는 좋은 것들이 날마다 쏟아져 나옵니다. 세상에는 부러운 사람들도 많습니다. 훌륭한 인격을 가진 자, 놀라운 지성과 매력 있는 개성의 소유자, 빼어난 미남 미녀들, 비범한 재주와 능력을 가진 자들이 가는 곳마다 등장하며 뭇 사람의 시선을 끌고 날마다의 화제에 오르내립니다. 세상의 발전은 날로 가속화되며 인간의 가능성을 거의 무한대로 팽창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외적 경이와 매력 뒤에는 무서운 도덕적 악행과 부패가 전세계적으로 쉬지 않고 자행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벗어났다가 되돌아 오는 첨단 과학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오염되었고 지구 자체도 인간의 죄로 인한 부식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롬 8:22). 지구는 낙원의 노래를 잊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구는 긴 장송곡의 곡조에 맞추어 묘지를 향해 날마다 행진합니다. 모든 인간의 뒤에는 보이지 않는 관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로 오염된 문명의 폐수를 마시고 살다가 결국에는 땅속으로 사라집니다.

여리고는 위치가 좋았지만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졌습니다. 여리고의 운명은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여리고의 문제는 이 세상의 문제입니다. 여리고의 상태는 우리가 처한 교회 현상이기도 합니다.  여리고의 작물은 쓴물의 영향으로 수확이 불가능하였습니다. 여리고는 겉으로 보기에는 번드드르한 곳이었습니다. 사실상 열매까지 달렸습니다. 문제는 열매가 익기도 전에 모두 떨어져 버렸습니다. 인간 종교도 이와 같습니다. 현대교회처럼 외양은 멀쩡하여도 열매를 먹을 수가 없다면 모든 것이 헛수고며 속임수입니다. 여리고의 쓴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수로 바뀌지 않으면 여리고는 죽음을 수확하는 곳입니다. 내 영혼과 우리들의 교회에는 어떤 종류의 물이 흐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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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랜도 코리아 위클리 15/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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