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 강해(19)

영적 가뭄을 피하라

열왕기하 4:38-44

“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왕하 4:38).

성경에는 흉년과 관련된 사건들이 많습니다. 성경의 흉년은 단순한 자연 현상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흉년에 대해 경고를 하셨습니다. 흉년은 종종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왕상 8:35-36; 렘 3:2-3).

“너희가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며…내 언약을 배반할진대 내가 이같이 행하리니…너희의 하늘을 철과 같게 하며 너희 땅을 놋과 같게 하리니 너희의 수고가 헛될지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라” (레 26:14-20).

젖과 꿀이 흐른다고 한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든 것은 역설적인 현상입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한마디로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과 우상 숭배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 우상 숭배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내던지는 배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주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을 잘 섬기면 국민 생활에 번영이 올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비가 철 따라 내리고 풍작을 이루며 인구가 늘어나고 질병으로부터 보호될 것이었습니다. 국가적으로는 전쟁에서의 승리와 평화가 약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의 바알 신은 농경신이기 때문에 비를 내리고 풍작을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우상 종교를 따랐기 때문에 율법에서 경고한 흉년의 심판을 자초한 셈이었습니다.

  1. 흉년일수록 말씀을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4:38)

백성들은 바알 숭배에 빠졌지만 적어도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7천 명은 바알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왕상 19:18). 그들 중에는 선지자 학교의 제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바알 앞에 앉지 않고 엘리사 선지자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앉아 있다’는 표현은 문하생으로서 배운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은 엘리사 밑에서 선지자 훈련을 받는 수련생들이었고 엘리사의 사역을 돕는 부교역자들이었습니다(왕하 2:16; 4:1; 6:1-3; 9:1-4). 이들은 엘리사의 메시지를  백성에게 전달하거나(왕하 9:1-4) 혹은 자신들의 메시지를 주기도 하였습니다(왕상 20:35).

선지자 학교는 오늘날과 같은 조직적인 교육기관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선지자 수련생들은 대부분의 현대 신학교에서처럼 현장 경험이 없거나 설교를 잘 하지 못하는 교수들로부터 아카데믹한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정보나 신학 이론들을 전달받는 것이 아니고 경험이 풍부한 선지자들로부터 직접 현장 사역의 훈련을 익혔습니다. 사무엘과 엘리야와 같은 대선지자들도 어떤 공식적인 기관에서 훈련을 받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은 엘리에게서, 엘리사는 엘리야에게서 수련을 받았습니다. 신학교가 목회자 양성소라면 현장 경험이 많고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의 증거가 있는 검증된 복음 사역자들이 가르쳐야 옳습니다. 학적인 것만 가르치면 목회나 선교 현장에서 실제적인 문제를 다룰 때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현대 신학교의 교육이 반드시 훌륭한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는데 필수 불가결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지금도 신학 교육을 정식으로 받지 않은 사람들이 정규 신학교를 나온 사역자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로이드 존스, 알렌 레드파스, 웥치만 니와 같은 분들은 세계적인 성경 강해자들이지만 신학교를 다닌 적이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학교에 가서 학위를 받고 못 받는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에게서 어떤 방식으로 배우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회자나 선교사를 배출하려면 그 분야에서 경험이 풍부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사용하시는 분들이 현장에서 실제적인 훈련을 시키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합니다.

  1. 스승과 제자의 자세

우리는 본문에서 스승과 제자의 자세에 대한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엘리사는 수넴 여자 집을 떠나 길갈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수넴 여자의 아들도 살렸습니다. 누군들 그런 선지자를 공대(恭待)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분명 수넴 여자의 극진한 후원을 받으면서 편안하게 머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흉년이 들었기에 여러 곳을 다니면서 힘들게 사역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길갈로 돌아와서 제자들과 함께 어려운 때를 함께 보냈습니다. 그는 흉년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제자들에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흉년은 선지자 학교에까지 기근을 몰고 왔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흉년의 굶주림을 제자들과 함께 겪으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의 능력을 가르치고 체험시킬 좋은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 같은 현장 훈련은 신학교 강의실에서는 받을 수 없습니다.

한편, 수련생들은 엘리사의 발 앞에 앉았습니다(4:38). 엘리사의 제자들이 어떤 시기에 엘리사 앞에 앉아 있었는지를 주목하십시오. 흉년으로 굶주릴 때였습니다.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기 마련입니다. 선지자 학교에 양식이 떨어졌는데 누가 남아 있으려고 하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훈련을 받는 곳이라도 우선 배를 채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엘리사의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흉년을 당한 때에 엘리사가 그들을 다시 찾아왔기 때문에 격려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려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며 엘리사의 가르침을 경청하였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은혜를 내리셨는지가 본 스토리의 배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자들을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 4:8)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진심으로 말씀을 구하며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내리십니다. 엘리사의 제자들은 흉년의 어려움 속에서 육신의 양식을 공급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양식도 받았습니다. 즉, 엘리사를 통해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에 언약에서 경고한 대로 가뭄의 형벌을 받았습니다(신 28:23-24).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영적 가뭄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내던졌습니다.  그들은 바알 신이 비를 내리고 자식을 주며 미래를 보장해 준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음에도 선지자들이 주는 말씀을 외면하였습니다. 우상숭배를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바알 신은 지금도 활개를 치며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교인들까지 유혹합니다. 현대 사회는 물질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모든 것이 돈입니다. 물론 생활을 위해서 물질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합니다. 물질생활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물질을 바알 신처럼 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이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준다고 믿습니다. 물질주의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선한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우선시하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까지 바알 신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잘 믿으면 내 일이 척척 풀리고 자식도 잘되고 재물도 생기며 미래도 보장된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기도가 그렇게 되게 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이것은 기복주의 신앙이지 복음 신양이 아닙니다. 물질주의에 편승하여 대형화의 길을 걸었던 우리나라 교회들은 상당수가 거부가 되고 세력이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기보다 물질을 사모하는 세속적인 종교 센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적용되지 않는 물질은 부패의 원인이 됩니다.  맘몬 신을 경배했던 교회들은 세상의 손가락질을 당하며 돈과 인기와 권위의 자리에서 추락하는 중입니다.

요즘은 세상의 욕을 먹고 멸시를 당하는 대형교회를 구태여 다니려고 하거나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교인들의 가치관이 복음의 사상으로 바뀐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대다수 교인들은 여전히 기복신앙의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질은 여전히 강력한 힘으로 교인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있습니다. 그 결과 말씀의 가뭄은 갈수록 심해지고 교회는 영적 기근으로 생명력을 잃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 숭배를 하다가 흉년을 당한 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상 숭배자들을 심판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흉년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지 않고 바알 신을 섬긴 것에 대한 무서운 심판이었습니다. 모든 종류의 자연재해가 반드시 다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들의 불순종과 관련해서 언급된 자연 재앙을 비롯한 질병, 패전, 흉작 등은 분명 하나님의 언약에 명시된 저주의 한 측면입니다(레 26:14-39).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이 있었음에도 영적 흉년으로 메말라갔습니다. 영적 가뭄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거두어 가시기 때문에 생길 수도 있고(암 8:11) 말씀이 풍성해도 듣지 않기 때문에 생길 수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엘리야도 있었고 엘리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성이 선지자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기 때문에 영적 기갈이 왔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약간의 개혁이 일어났지만 오래가지 않았고 바알 종교가 여전히 득세하며 여호와 종교의 존속을 위협하였습니다.

흉년이 온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세속주의의 우상 신에게 팔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우상과 우상 숭배자들을 심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질적으로 풍족한 때에도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고 흉년이 닥쳐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망하였습니다. 남부 유다도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물들어 패망하였고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 가뭄에 시달리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요즘은 옛날과 달라서 초라한 모습의 교회당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교인들도 일부 극빈자들을 제외한다면 그렇게 가난한 편은 아닙니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배를 곯던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국가적으로 보면 빈부의 격차가 날로 심해지고 가계 부채도 위험수위입니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가 빈곤했던 시대는 아닙니다. 그런데 경제적인 생활 수준이 높아졌다고 해서 영적 수준도 덩달아 올라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 현상이 왔습니다. 교회가 매우 가난했을 때에는 물질적 부패가 없었습니다. 생활이 어려웠을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요즘처럼 물욕과 탐심으로 마음이 썩지는 않았습니다. 번영 신학과 세속적인 구복 사상을 교리와 생활에서 몰아내지 않으면 기독교는 갱신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유심히 바라보는 곳은 우리들이 얼마나 많이 벌고 얼마나 여유 있게 사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교회당의 크기나 교인 수나 헌금액수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얼마나 주님을 사모하며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사랑의 삶을 실천하고 사는지를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바알 신을 섬기기 때문에 영적 가뭄을 겪고 있지 않은지를 보십니다. 경건한 자들도 흉년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제자들처럼 역경에 처하여도 하나님을 의존하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적어도 말씀의 가뭄은 체험하지 않습니다. 엘리사의 제자들은 엘리사의 발 아래 앉았습니다. 그들은 영적 양식이 풍성히 내리는 곳에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엘리사의 가르침을 받는 한, 선지자 수련생들에게는 영적 가뭄은 없었습니다. 가뭄과 기근 때에라도 영혼은 건강하고 풍요로울 수 있습니다. 주님의 참백성들은 어려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깊이 체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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