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시편 1편)

크리스천들은 누구나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복을 받는 어떤 특별한 공식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십일조를 꼬박꼬박 낸다든지, 직책을 받고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한다든지, 목회자를 잘 대접한다든지, 작정 기도를 한다든지, 안수 기도를 받는다든지, 일천 번제를 올린다든지 하면 정말 복을 받을까요? 시편 1편의 주제는 복(福)에 대한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의인과 악인의 대조로 정의합니다. 인간의 복이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의되고 서술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응하며 살 때에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시 1:3)한다는 것입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길을 따르지 않습니다(1절).

본 절에서 악인은 ‘복 있는 사람’과 대조되기 때문에 ‘복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적인 의미에서는 복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 고생만하고 낙을 누리지 못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본 시편에서는 복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오만한 인간들입니다. 그들은 부도덕하기 때문에 악한 꾀로 일을 성사시키고 남에게 해악을 끼칩니다.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3절)는 말은 세상의 표준으로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복 있는 자는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는 의인이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바라고 삽니다. 그래서 세상의 표준에 맞춘 복의 개념으로 자신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세상의 눈금으로 측정할 때에 번성의 수치에 밑돌더라도 자신을 복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경건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2.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항상 묵상합니다.    

우리는 일정한 시간에 성경을 보는 것을 묵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묵상의 원뜻은 혼자 중얼거린다는 의미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일반 백성이 성경을 소유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들은 말씀을 중얼거리듯이 암송을 하며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시 119:11). 묵상은 일정 시간을 개인 경건을 위해 떼어 놓는 것이 아닙니다. 묵상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말씀을 가슴에 담고 음미하면서 모든 일에 적용하며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수 1:8). 여기서 율법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말씀을 가리킵니다. 시편이 쓰여진 이후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신약 시대의 우리들은 훨씬 더 풍성한 분량의 성경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율법’을 묵상한다는 것을 신약까지 포함시킨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대해서 적용해야 합니다.

3. 복 있는 사람은 풍성한 열매를 향해 나아갑니다.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잎이 청청합니다. 잘 먹고 잘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악인들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누리는 영적 풍성함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는 악인들은 바람에 날리는 쭉정이와 같습니다(4절).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무것도 형통한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멸망할 것입니다. 반면, 의인은 하나님께서 장차 나타내 보이실 미래의 영광에 참여하는 특권을 약속받았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습니다(5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는 의인과 악인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을 압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사는 것은 삶에 활력을 불어넣고 고난과 불의를 견딜 힘을 줍니다.

복 있는 사람은 자기 부정과 순종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가는 사람입니다. 내 일이 잘 풀리고 가족이 잘 되고 돈이 잘 벌리고 병이 안 걸리는 것이 축복의 대명사가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들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길이 아닌 주님의 길을 따르면서 누리는 복은 세상이 주는 형통과는 매우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주님의 길을 따르는 자의 어깨에는 항상 십자가라는 자기 부정과 고난이 걸려 있습니다. 그래도 견디는 것은 환난 가운데서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고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임재의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며 칭찬하시는 복 된 길이기에 힘을 내며 마침내 승리할 것을 믿고 풍성한 축복의 열매를 위해 나아갑니다.

최근에 아직도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고생하다가 어린 두 자녀들을 남겨두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간 자매 한 분이 계십니다. 저는 그분과 이메일로 자주 연락을 주고 받았습니다. 고통 속에서 쓴 메일의 내용을 보고 마음 아파한 때도 많았고 또 감사한 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제게 가장 큰 감동을 준 것은 그분의 이메일 주소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바라기” 였습니다. 그분은 그 큰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며 사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병에 안 걸리는 자가 아니고 질병을 앓으면서도 자기가 받은 축복들을 고백할 수 있는 자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역경을 거치지 않는 자가 아니고 고난 속에서도 영생의 복을 체험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입니다. 의인에게도 인생의 기복(起伏)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두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이것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형통한 삶입니다.

4. 우리는 무엇을 보고 복이 있다고 하는지를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말하는 복의 개념에 익숙해 있습니다. 전통적인 구복 사상에서 다루는 복은 전적으로 자기 중심적이며 현세 중심입니다. 즉, 건강, 재물, 자녀 잘 되기, 성공과 출세, 무사안일 등등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하나님께서 복이라고 부르시는 것을 참된 복으로 알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복 있는 자라고 인정하시는 자가 복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통 문화의 복의 개념과 성경에서 말하는 복의 개념이 어떻게 다른지를 확실히 구분해야 합니다(마 5:3-10).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복을 달라고 간청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기를 원하시는 복은 받지 못하거나 무관심하게 됩니다.

시편 1편에 나오는 의인의 복은 산상 설교의 복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복이 있는 자들은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온유하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긍휼히 여기며 화평을 도모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받는 복은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도 포함될 수 있지만 그 보다는 하나님의 임재나 구원의 기쁨이나 혹은 심령의 안식과 같은 영적인 축복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마 5: 3-12; 막 10:29-30).

예를 들면, 내가 악인의 길을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이 가르치신 말씀에 순종한 것이기에 양심이 깨끗합니다. 악인의 길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박해를 받았다면 주께서 기억하시고 후히 갚아 주실 것을 바라며 참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따뜻한 격려와 후한 칭찬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힘쓸 때에 하나님의 인정과 임재를 체험합니다. 이런 복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나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는 신자들이 누릴 수 없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고 흡족해 합니다. 이것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의인의 삶입니다.

5. 심판의 날이 올 것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5절의 결론은 “그러므로”로 시작됩니다. 악인의 장래는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번드레하고 힘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저울에 달면 무게가 나가지 않습니다(단 5:26).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는 무가치한 것을 붙잡고 살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들의 열매는 아무리 많아도 헛것입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오만은 타작마당의 도리깨질 앞에서 견디지 못하고 낟알에서 분리되는 겨와 같은 운명을 맞습니다. 그가 이룬 모든 것이 허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면 헛되고 헛된 것이 그의 성공이며 공적이며 재산일 것입니다. 인간은 한 번 태어나면 반드시 죽습니다. 그 다음 영원한 심판을 받습니다(히 9:27). 악인의 길은 멸망의 길이며 사망의 길입니다(6절; 잠 14:12 ). 그들은 복 없는 자들로서 영원한 멸망을 당합니다.

반면 하나님은 복 있는 사람들을 지켜 주십니다. 6절의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는 말은 깊이 아시고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창 4:1; 출 2:25). 하나님은 경건한 자녀들이 악인의 길을 따르지 않고 주를 위해 살려고 애쓰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사랑하시며 보살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반드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신자들도 사후에는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고후 5:10; 롬 14:10). 그 때에 우리들의 삶에 대한 주님의 평가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복 있는 사람의 삶을 살지 않았다면 주님의 부정적인 평가가 내릴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5)

시편 1편은 대조로 시작됩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있습니다. 복 있는 자의 길과 복 없는 자의 길이 있습니다. 의인의 길은 흥하고 악인의 길은 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길을 인정하시고 악인의 길을 심판하십니다. 제 3의 길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복 있는 자에게 속하거나 복 없는 자에게 속합니다. 의인이 아니면 악인입니다. 하나님의 칭찬을 받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복 있는 자는 한편으로는 악행을 멀리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가까이 합니다. . 그런데 누가 과연 진실로 ‘복 있는 자’로서 살았습니까? 복 있는 자의 길을 가장 완벽하게 걸은 분이 누구입니까?  다윗 왕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이었습니까? 바울이나 사도 요한이었습니까? 그들도 모두 복 있는 사람들로서 살았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으며 의인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의 모범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절대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고난의 주로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온통 고통과 수난이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가장 행복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시편 1편의 ‘복 있는 자’의 절대 모델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난의 주’이실 뿐만 아니라 ‘복 있는 사람의 주’도 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전적으로 사시고 악인의 길로 다니시지 않았습니다. 시편 1편에 나오는 ‘복 있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누가 율법을 가장 완전하게 지키셨습니까? 율법 준수의 최대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율법은 예수님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모세 시대의 율법이 아닌 예수님을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시냇가는 하나님의 축복의 풍성함을 시사하는 이미지입니다. 하나님은 넘치게 복을 내리기를 원하시고 다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용서의 강물과 격려의 강물과 깨달음의 강물과 평안의 강물과 소생의 강물이 철철 흘러내립니다. 캘리포니아는 대부분 사막입니다. 주거지의 초목은 모두 스프링 쿨러로 물을 줍니다. 그런데 도시를 떠나면 황막한 불모지입니다. 그런데 간혹 푸른 곳이 있습니다. 밑에 샘물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물만 있으면 사막에서도 청청하게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의 강물이 흐르는 곳에 내 영혼의 뿌리가 내리고 있으면 사막 같은 이 세상에서 푸르게 살 수 있습니다.  내가 복 있는 사람이 되고 못 되는 것은 내가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리면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단순하고 간단한 진리입니다.

플로리다 코리아 위클리 08.06.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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