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갈의 하나님

본문: 창세기 16:1-14

‘해갈의 하나님’이라는 제목이 좀 생소하게 들리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여종인 하갈에게도 동일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 본문의 중요한 요점입니다. 본 장은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16:1)라고 시작됩니다.. 어떤 문제를 놓고 오래 동안 기도해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응답이 없을 때에는 매우 섭섭합니다. 더구나 내가 정해서 올린 소원기도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인데도 응답을 하시지 않는다면 더욱 서운하고 원망스러울 것입니다. 사라(사래)가 불임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그녀가 하란에 있을 때에 언급되었습니다(11:30). 그 후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도착하였고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났을 때가 75세였습니다(창 12:4). 그가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는 86세였습니다(16:16). 10년이 지난 후에도 사라에게는 아기가 없었습니다(창 16:3).

[1절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라가 심리적으로 너무 지쳐서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될 가망이 없었다고 보고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하갈이라는 여종이 있었다는 언급이 따라서 나옵니다. 이로써 사라가 자식 문제를 어떻게 스스로의 계획으로 해결하려고 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아브라함 역시 자식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다가 너무 지쳤습니다. 그래서 한 때, 자기 종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15:2-3). 하나님께서 그에게 씨를 주시지 않으니까 할 수 없다는 식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가 그의 상속자가 되고 그의 후손이 하늘의 뭇별과 같을 것이라고 재차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여종을 통해서 자식을 보자는 사라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에 얼마나 경건했는지 모릅니다.  솔개가 희생 제물 위에 내릴 때에 온종일 쫓았던 사람이었습니다(15:11). 그 때 그는 그의 후손이 4백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바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가나안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놀라운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하갈과 동침할 수 있었을까요? 가장 경건한 사람이 가장 육적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의 축복까지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창 14:19). 이사야서에서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사 41:8; 약 2:23). 그처럼 하나님과 밀착된 교제를 한 사람이 구약 시대에 몇 명이나 됐겠습니까?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자신의 절박한 문제에 부딪쳤을 때 육적인 길을 택하였습니다. 광야의 시험은 우리를 쉽게 넘어지게 합니다.  나의 육욕을 만족시키려고 내 곁에서 대기 중인 하갈은 밀어내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갈의 문제를 놓고 아브라함과 사라를 너무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향을 떠나 타국에 와서 많은 시련을 겪은 나이 많은 사라와 아브라함을 동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입장이라면 우린들 나았겠습니까? 아마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큰 계시를 받은 사람이 아닌 평범한 교인들이기 때문에 더 잘 넘어지는 것이라고 자위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셨던 구원보다 훨씬 더 큰 스케일의 복음의 계시를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앞으로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멀리서 희미하게 바라보았을 뿐이었습니다(요 8:56).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다 듣고 또 그 주인공인 주님을 성령 안에서 날마다 만날 수 있는 신약 시대에서 삽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정에서 수풀에 걸린 수양을 제물로 바칠 때에 대속의 구원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십자가에 직접 달려서 우리 죄를 대속하신 사실을 신약 성경을 통해서 압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계시되지 않았던 많은 구원의 진리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시험에 빠지며 주님의 길이 아닌 육신의 길을 따라가는지 모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흉볼 것이 전혀 없는 우리들입니다. 물론 아브라함과 사라의 행위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늙은 노부부의 처지를 이해하시고 동정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고 너무도 아닌 방법을 사용했을 때 배신감을 느끼시고 그들과의 언약을 취소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직도 먼 길을 가면서 점점 더 깨달아 마침내 온전하게 될 것을 기대하시면서 오래 참으시고 용서하셨습니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도 동일하게 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실수를 기계적인 원칙으로 처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처한 어이없는 정상도 참작하시고 동정하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서하기를 기뻐하십니다. 본 장에서 보면 잘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사라도 하갈도 모두 부끄러운 일들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런 부족한 사람들의 모습에 비해서 하나님의 모습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 본 스토리의 주안점입니다.

우리는 자신들의 모습에 초점을 둡니다. 하나님을 보기 전에 자신을 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자신을 책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참고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설교에서 귀가 닳도록 이런 말을 듣습니다. 그래서 작심을 하고 잘 섬겨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합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먼저 배우고 기억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 못난 꼴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이라는 편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신의 방법을 쓰지 말고, 화급하고 답답해도 이삭을 기다려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를 먼저 깨닫지 못하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편에서 무엇을 자꾸 하려고 합니다.  물론 우리에게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 큰 것을 알아야 합니다.

◐ 우리는 내가 인내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인내하신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닮으며 그분의 약속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 내가 주님을 사랑하려고 하기 전에, 주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를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 내가 순종하기 이전에, 주님이 얼마나 하늘 아버지를 순종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 내가 주를 섬기기 전에, 주님이 내 발을 씻기시고 나를 섬기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종하라, 인내하라, 섬겨라 하는 말들은 또 다른 종류의 종교적 속박의 구호에 그칠 뿐입니다. 우리들이 마음이 있어도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어떤 일을 이루셨고 지금도 어떻게 우리를 대하고 계신지를 주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먼저 보여야, 그 아래 엎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순종이 먼저 보여야, 내가 주님의 길을 따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먼저 느껴져야, 내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인내가 깨달아져야, 내가 인내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이것을 아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본 장의 의도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이 어떤 모습으로 아브라함 가정에서 역사하셨는지를 알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억지로 일을 꾸며서 약속된 축복을 받아내려다가 엉망이 돼버렸습니다. 하갈의 사건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일궈놓은 일들이 모두 허사가 되는 듯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들이 딴 길로 갔다고 해서 포기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하갈의 스토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멸시와 학대 속에서 죽어가는 한 여종에게 찾아 가셔서 상상할 수 없는 큰 축복을 내리셨습니다. 하갈은 불볕 같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나를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16:13).하갈은모든것을포기하고자살의광야 길로내달았지만, 하나님은그녀를포기하시지않았습니다. 하나님은오히려샘물 곁에서 하갈의메마른영혼을적셔주실준비를하고계셨습니다.

하갈의 하나님은 해갈(解渴)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갈처럼 인생의 목마른 광야에서 삽니다. 우리 모두에게 채워지지 않은 목마른 부분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메마르기 때문에 영적 갈등을 느낄 수 있고 인간 관계에서 목이 타오를 수 있습니다.  영혼의 갈증을 풀 길이 없어 하갈처럼 광야에서 방황해 보셨다면  하갈의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갈의 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갈증을 풀어주시는 “해갈의 하나님”이심니다.

1) 해갈의 하나님은 약자의 고통을 동정하십니다(창 16:1-16; 21:8-21).

하갈은 임신 후에 사라를 멸시하였습니다(16:4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잘못을   지적하기 보다 그녀의 고통을 동정하시고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순종하라고 타이르셨습니다(16:9). 우리는 죄인의 실수와 잘못에 먼저 시선이 가지만, 하나님은 죄인의 고통에 먼저 시선이 가십니다.  하나님은 약자의 고통을 동정하십니다. 하갈은 약자였습니다.

2) 해갈의 하나님은 대책 없는 동정은 하시지 않습니다.

하갈은 여주인의 학대로 도망친 자였기 때문에 그냥 되돌아갈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무조건 돌아가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따뜻한 음성으로 하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임신한 아기의 출산에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보장을 하셨습니다(16:11)
  • 아이가 독립하여 형통할 것도 예고하셨습니다(16:12).
  • 자손 번성의 약속도 주셨습니다(창 16:10; 참조. 창 25:12-18).
  • 아기의 이름까지 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임신한 하갈의 심리적인 불안을 모두 해소시켜 주셨습니다.  자식에 대해서 이런 약속들을 받았는데 더 이상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갈은 담대하게 여주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3) 해갈의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평생을 갑니다.

하갈은 드디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스마엘(‘하나님께서 내 고통을 들으신다’)을 부를 때마다 자신의 고통을 들으셨던 하나님을 회상했을 것입니다.  하갈의 남은 인생살이에 얼마나 큰 격려가 되었겠습니까!

4) 해갈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해서도 동일한 자비로 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사악한 제안을 수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취소하고 대노하셨습니까? 이스마엘을 저주하시고 사라를 정죄하셨습니까?. 사라는 하갈의 일로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16:5) 원했으나 여호와는 아무도 판단치 않으셨습니다. 판단을 하셨다면 자비의 판단이었습니다. 하갈이 사라를 멸시했지만(16:4) 하나님은 하갈을 심판하시지 않았습니다.

▣ 창세기 16장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주 저지르는 불신과 어리석은 죄악들에 비해서, 하나님은 얼마나 자비하시고 동정적이시며 용서에 후하신 분인지를 대조시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그런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그분의 모습을 닮으면서 오직 그분께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하나님은 실로 우리들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해갈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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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위클리 2014.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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