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사슬의 은혜       

1:12-18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례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특별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엡 2:10) 사는 것입니다. 선한 일에는 여러가지 선행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단순히 일반적인 자선 행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는 선한 일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사랑과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주 예수의 형상을 닮으며 교회와 세상의 갱신을 위해서 수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고 했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예수 믿는 목적을 세상에서 복 받고 사후에 천국가기 위한 것으로 안다면, 고난이 왔을 때 회의가 들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의 문맥 안에서 고난을 잘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복’이라는 개념도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신자들이 예수 믿으면서 어려워하는 주된 이유의 하나는 ‘성경이 말하는 복’을 일반적인 ‘세상의 복’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난에 대한 성경의 설명을 듣지 않고 세상의 생각대로 보고 느끼기 때문에 혼란이 옵니다. 바울은 이 점에서 훌륭한 모델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난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잘 깨닫고 힘든 옥중 생활에서도 격려를 받았습니다.  물론 여러가지 고난의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 시원하게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잘못이 아닌데도 욥처럼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데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다루는 고난은 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믿음 생활을 하려고 할 때에 오는 고난들입니다.

우리들도 이런 저런 고난을 나름대로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고난은 대부분 내가 잘못 선택한 일의 결과거나 내 욕심을 따라 가려다가 당한 일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고난들을 외면하시고 “네가 잘못했으니 당하라” 고만 하실까요? 감사하게도 그러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동정하십니다. 우리들이 불완전하고 타락한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실수도 하고 서로 고난의 원인 제공자가 된다는 것을 주님께서 이해하십니다. 주님 자신도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사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간증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고난의 의미를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겪는 여러  종류의 고난들을 이해하고 대처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바울은 자신의 고난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주 투옥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날마다 주여, 주여 하면서 출옥되기만을 기다렸습니까? 우리 같으면 아마 그렇게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갇혀 있는 동안에 주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의 비결은 주님께 자신을 헌신한 것이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 하려 하나니”(빌 1:20).

바울에게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이 존귀하게 되는 것이 자신의 인생 목표였습니다. 우리들이 고난을 이기려면 먼저 주님께 내 삶을 넘겨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삶을 주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자신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과 부르심에 삶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래서 투옥이 됐지만 불편과 염려를 잊고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소명에 날마다 충실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화가 변하여 복이 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주님을 섬길 때에 원치 않는 환경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빠져 나오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그러나 바울처럼 고난의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고통을 참으면 하나님의 큰 능력을 체험한다는 것이 본문의 교훈입니다. 우리들은 자신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복을 주시려고 하는지를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바울처럼 ‘당하면서’ 살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전혀 감도 잡을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내가 당하는 시련 속에서 체험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 내가 당한 일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간은 고난을 본능적으로 싫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에서 보면 고난은 은혜의 한 방편입니다. 주님에 대한 충성으로 인해서 오는 고난은 복의 씨앗을 담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시련의 씨앗들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 열매는 성도들의 영적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립니다.

고난을 통해 다듬어지지 않는 성도가 없습니다. 고난 속에서 낮아지지 않는 성도도 없습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는 성도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고난을 피해 다닙니다. 그 결과 고난 속에서 넘치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크나큰 위로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들의 심령이 새로워지고 믿음이 담대해지며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신뢰하게 됩니다. 이것은 경험을 해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고난이 없는 만사형통을 원하며 편안하게 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물론 하나님은 좋은 여건 속에서도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쇠사슬의 교훈도 반드시 체험적으로 배워야 합니다. 우리들은 묶이는 것도 없고 불편한 것도 없어야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복의 개념이 아니고 세상이 말하는 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들의 눈에 긍정적인 것들도 있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쇠사슬은 부정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쇠사슬도 하나님께서 때로는 더 귀히 쓰시는 은혜의 수단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각자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나는 쇠사슬의 은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기 때문에 내가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손해를 보며 불편하게 살아본 적이 있습니까?

★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십자가 사랑에 감복되어 내게 소중했던 것들을 내던져 본 적이 있습니까?

삶이 쉽게만 진행되는 여건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힘들고 불편한 역경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편이 우리들의 영혼을 위해 더 안전하고 바람직합니다. 편안할 때에는 자신의 무력성을 통감하며 오로지 하나님만 의존하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수월하게 살 때에는 하나님께 감사는 하여도 환난 속에서 역사하시는 위로와 능력의 하나님은 만나지 못합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

2. 쇠사슬은 자신의 영적 실체를 드러냅니다.

쇠사슬이 은혜라는 사실은 체험적인 고백이기 때문에 내가 직접 당해 본 경험이 없으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바울의 쇠사슬을 통해 행하신 일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었을까요?

첫째, 쇠사슬은 바울을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인생의 바퀴에 제동이 걸렸다는 것은 기다림의 시간이 왔음을 뜻합니다. 우리는 기다리면서 초조해 합니다. 기다리면서 화를 내고 염려하며 회의에 빠집니다. 우리는 기다리다가 흔히 포기해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들을 기다림의 장소로 데리고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도 할 일이 많고 시간이 아까운 바울을 감옥에서 여러 해를 보내게 하셨습니다. 어찌 보면 커다란 낭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역 자체보다 사역자 자신의 훈련에 더 많은 시간을 쓰십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옥중에서 받은 훈련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중의 하나는 기도였습니다(9-11절). 그는 옥중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직접 방문을 하거나 만날 수 없는 성도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쇠사슬은 결국 바울로 하여금 남을 위해 더 많은 기도를 올리게 하였습니다.

둘째, 쇠사슬은 영감의 메시지가 나오게 하였습니다.

바울이 남긴 깊은 영감의 글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감옥에서 쓰여졌습니다. 사실상 신약 성경 전체가 박해와 고난의 세월 속에서 엮어졌습니다. 바울 자신도 그의 옥중 서신들이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읽혀질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쇠사슬의 은혜는 우리들의 기대와 상상을 넘어가는 축복의 고리들을 길게 이어나갑니다.

셋째, 나의 쇠사슬은 다른 사람들의 정체를 드러내는 검침(檢針)입니다.

바울이 감금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두 종류의 반응이 나왔습니다. 한편은 바울의 손발이 묶인 것을 생각해서 복음을 더 열심히 전하였고, 다른 한편은 바울이 갇힌 것을 자신들의 득세의 기회로 보고 그릇된 동기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쇠사슬을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다른 사람들의 의도와 동기를 드러내는 검침으로도 사용하십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는지를 반성하게 하는 경고와 교훈이 되어야 합니다.

맺는 말

하나님은 복음의 진보를 위해 역사하시지만 성도들의 영적 진보도 중요한 목적으로 삼고 계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들의 삶에 때때로 쇠사슬의 제동이 걸립니다. 그렇지만 쇠사슬의 시기 동안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인내를 습득하며 고독한 골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만 간구하게 됩니다. 쇠사슬의 속박은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고난에 자신을 일치시키게 하고 영광의 영이 우리 위에 임하는 은밀한 위로를 체험하게 합니다(벧전 5:13).

이렇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영혼은 영감의 노래를 부르고, 감동의 메시지를 전하며, 심금을 울리는 간증을 토로합니다. 이것이 쇠사슬 아래에서 고통받는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두시는 승리의 열매들입니다. 섭리의 하나님은 복음을 위해 살기를 원하는 우리들을 보다 더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품으로 덧입히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봉사와 선한 양심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헐벗게 하시고,  편안한 생활에 쇠사슬을 채우십니다.

바울 사도와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쇠사슬이 채워졌다면 우리들인들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존재가 자만과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과 영적 졸음에 빠지기 쉬운 약점에서 깨어나도록 하나님은 종종 우리들에게 쇠사슬로 임하십니다. 나의 손발을 묶어 두시고 나를 매우 불편하고 부끄럽게 하십니다. 내 입에서 한숨이 나오게 하시고 내 마음이 불안에 떨게 하시며 내 심령이 자유의 날을 위해 부르짖게 하십니다. 나의 쇠사슬은 나의 기막힌 처지를 공증합니다.

나의 쇠사슬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무릎을 꿇게 합니다. 나의 쇠사슬은 나의 교만한 의(義)를 밀어내고 나를 겸비하게 만듭니다. 나의 쇠사슬은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는 믿음의 기도를 올리게 하고 주를 위해 사는 삶의 실체를 보게 합니다. 여러분은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무한히 동정하시는 위로의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쇠사슬로 내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손에는 우리 눈에 가려진 금사슬도 쥐어져 있습니다. 쇠사슬을 통해 금사슬의 복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믿고 고통스런 인생의 감옥에서 무릎을 꿇으십시오. 하나님이 내게 쇠사슬로 임하실 때에는 언제나 신령한 복이 따른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쇠사슬의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사랑하고 더 잘 섬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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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30 플로리다 코리아 위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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