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본문에서 다루는 주제는 ‘기업(基業)’입니다. 기업은 유업이나 상속이라고 고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기업은 기업(企業)체라는 뜻이 아닙니다. 좀 더 실제적으로 표현하면 상, 혹은 상급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제를 잘못 전하면 오해를 받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나라 교회에서 70년대 이후로 한 동안 부흥사들과 목회자들이 예수 잘 믿어야 상 받는다는 것을 매우 유치하게 전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지요.

☞ 십일조 잘 내면 하늘 곡간에서 복이 쏟아져 내린다.

☞ 목사 잘 대접하면 자식 잘 된다.

☞ 건축 헌금 많이 하면 천국에서는 대궐에서 산다.

☞ 교회 봉사 잘 하면 천국에서 황금 면류관 쓰고, 교회 잘 섬기지 않는 자들은 개털 모자 쓴다.

☞ 헌금 잘 내는 사람의 천국 집의 잔디는 푸르고 헌금 떼 먹은 사람의 정원은 잔디가 다 타 죽는다.

☞ 보통 피아노를 헌물하면 천국에서는 Grand-piano를 받는다.

☞ 열심히 섬기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맨션 옆의 좋은 집에서 살고 헌신하지 않는 자들은 보통 집에서 산다.

☞ 헌금 많이 내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면 자식 잘 되고 물질의 복을 받으며 세상에서 출세한다.

모두 돈과 교회 봉사에 관련된 상급들입니다. 목사에게 잘 같다 바치고 교회 잘 섬기면 상 받는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런 말들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갔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이런 식의 설교를 하고 그렇게 믿는 신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소위 말하는 번영신학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요즘은 말을 바꾸어 성공신학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의식이 있는 분들은 기독교를 물질주의로 바꾸었다고 비판하고 싫어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맘몬 신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복 받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고 봉사하고 헌금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 받는다는 말이 나오면 식상해 합니다. 사실상 70년도 이후로 유행하는 세속적이고 상리적인 상급 교리는 분명히 복음의 왜곡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들이 주의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잘못된 가르침과 그에 따른 부정적인 현상 때문에 복음의 진리 자체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때, 다미 선교회가 92년 10월 28일에 휴거가 발생하고 99년에 종말이 온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맞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에 큰 관심을 가졌다가 실망하고 그 후로는 아예 예수님의 재림 자체에 스위치를 끄고 삽니다.

최근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본부를 둔 종말론 단체인 ‘패밀리 라디오(Family Radio)’의 해롤드 캠핑 대표가 2011년 5월1일에 택함 받은 자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휴거가 발생할 것이며 5개월 간 극심한 자연 재해가 계속되다가 2011년 10월21일 지구가 완전히 멸망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과거에도 1994년 9월 6일에 휴거가 있을 것이라고 예고한 적이 있었지만 물론 맞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상투적인 변명은 날짜 계산에 오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날짜를 정한 후에 이번에는 확실하다고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이런 식의 종말론이 지긋지긋하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이들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관심이 적은 또 다른 이유는 교회가 물질주의에 빠져서 지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일을 우선시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재림 안 하셔도 좋으니까 이 세상에서 잘 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죽으면 천국은 맡아놓았으니까 구태여 예수님 안 오셔도 지장이 없습니다.” 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 때문에 성경의 진리인 예수님의 재림 자체를 잊고 살거나 제쳐 놓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큰 소망으로 알고 간절히 기다려야 합니다.

상급 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흥사들과 일부 목사들의 가르침이 유치하고 비성경적이라고 해서 성경의 진리인 상급 교리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반응은 또 하나의 극단입니다.

☞ 밥을 먹다가 돌이 씹혔다고 해서 밥그릇 전체를 내던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돌은 골라내고 밥은 먹어야 합니다. 영어 속담에서처럼(Throwing the baby out with the bathwater) 아기를 목욕시킨 물을 버리려다가 아기까지 함께 버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더러운 물은 버리되 아기는 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상급에 대해서 가장 많이 가르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산상 설교에는 상에 대한 말씀이 매우 자주 나옵니다(마 5:11-12, 46; 6:1-2, 5, 16, 18). 바울도 상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였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유업을 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2절).

본 절은 구약에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하나님의 약속들을 반향합니다. 유업이란 말은 구약 개념입니다.  그래서 유업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구약의 문맥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구약 시대의 유업은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요단 강 건너가 만나리’ 라는 찬송은 가나안 땅을 천국으로 본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땅을 떠났을 때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상징하는 양의 피로써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천국에 대한 그림이 아니고 천국 백성이 된 이후에 받는 유업에 대한 예시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천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 누리는 유업의 축복들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무력으로 정복하였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받는 방식이 아닙니다. 구원은 정복을 해서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믿고서 거저 받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나안 땅은 양의 피로써 출애굽의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실제로 싸워서 빼앗은 유업의 땅입니다. 따라서 가나안은 사후의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유업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가나안 땅은 그리스도 안에서 받게 될 ‘하늘에 쌓아 둔 소망’(골 1:5)에 대한 물체적인 화살표였습니다. 이 소망은 하나님 나라의 축복들인데 지상에서부터 받을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사후에 온전히 받습니다(롬 4:13).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를 자신의 대속주로 믿고 의롭다는 선언을 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이 유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셨습니다. 이것을 ‘합당하게 하셨다’고 표현하였습니다(골 1:12).

그럼 신자들에게 유업 상속의 자격을 부여하신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의 피로써 우리를 속량하시고 흑암의 권세 아래 갇혀 있던 우리들을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신 것입니다(13-14절). 이것은 출애굽의 이미지를 반영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고 어둠의 왕국에서 빛의 왕국인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것은 새로운 출애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죄와 흑암의 왕국이었던 애굽에서 구출되어 가나안의 유업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상속받았습니다. 이처럼 크리스천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유업을 받습니다. 성도들은 사탄의 왕국에서 그리스도의 새 나라로 옮겨져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약속된 유업을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공동 상속자들입니다(롬 8:17; 마 5:5).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으로 옮겨졌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는 것이 유업을 받는 첫 걸음입니다.

우리들은 회복된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영광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시 2:8; 롬 4:13). 그래서 우리는 이 영광의 미래를 기대하며 그에 맞추어 살아야 합니다. 유업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이 되도록 기도하였습니다(12절).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행하신 구원의 의미를 항상 되새기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마땅합니다. 감사가 없는 삶은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기이한 축복인지를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2. 유업은 복음의 일부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죄인들이 아무런 선행이나 공로가 없이 단지 주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받는 구원뿐만이 아니고 유업의 축복도 담겨 있습니다. 유업은 단순히 사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거나 흔히 생각하듯이 하나님 자신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받는 첫 구원과 유업은 서로 연관된 것일지라도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천국과 유업도 이와 같습니다. 유업은 천국의 연장선 위에 있지만 유업이 곧 천국은 아닙니다. 그러나  유업은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포함된 무궁한 축복들이며 현세에서부터 누리기 시작하는 새 언약의 은혜들입니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유업이란 모든 성도들이 상속받을 수 있는 합당한 자격이 주어졌을지라도, 자동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상은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삶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이며 보상입니다.

성도들에게 유업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시사할까요?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하나님께서 각 자의 몫으로 상속해 주기를 원하시는 축복들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유업의 축복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면서 주께 합당하고 거룩하며 사랑에 찬 삶을 살면서 선한 열매를 맺을 때에 받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힘 입어서 복음을 위해 고난을 견디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무엇인가 희생하며 기여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삶을 기뻐하시고 상을 주십니다(골 1:9-11)

3. 유업은 거룩한 삶의 동기를 부여합니다.

교인들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압니다. 거룩한 삶을 성화라고 부릅니다. 성화가 잘 되려면 먼저 자신이 어둠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완전히 옮겨졌다는 사실을 확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녀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한 뜻은 우리들로 하여금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업의 축복들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내 자식들이 잘 되기를 원합니다. 하물며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시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기꺼이 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들만 달랑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고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아들과 함께 아들에게 속한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선물들을 계속해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축복들을 주시려고 만세 전부터 계획하셨습니다(엡 1:3, 14).

이제 우리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을 구원의 선물로 받았다면 그에 후속되는 다른 모든 축복들도 받아 누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한 뜻입니다. 물론 죄와 정죄와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더욱 풍성한 축복을 누리는 자녀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이 지상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러한 복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유업의 상급들입니다. 구원을 받았으면 그 다음부터는 이러한 유업의 상들을 받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선한 뜻이 담긴 유업의 축복들을 향해 나아갈 때에 우리들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해지고 생기가 나며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것을 누리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유업의 상은 지상에서부터 받고 체험할 수 있는 은혜들입니다. 유업을 바라보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애씁니다. 그들은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업은 거룩한 삶을 사는 강력한 동기부여가 됩니다.

4. 그럼 어떻게 해야 이러한 유업을 누릴까요?

첫째, 바울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4)고 하였습니다. 또 이어서 그는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골 3:25)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의를 행하는 자에게는 의의 보상이 있다는 것을 대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행과 악행을 갚아 주시고 의와 불의를 갚아 주시는 분입니다. 다음 구절들을 찾아 보십시오. 마 5:11-12, 46; 6:1-6, 16, 18; 10:41; 요 5:29; 롬 2:6-10; 12:19; 계 11:18; 22:12; 삼하22:21-28; 사 62:11; 렘 31:16.

유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후한 약속들입니다. 유업의 상을 바라고 사는 것은 히브리서 11장이 진술하듯이 믿음의 선열들이 지닌 특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믿음의 선조들이 지녔던 이러한 유업의 소망들을 지니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 유업은 근면과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습니다(골 1:11; 히 6:12; 11:6).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각자에게 주어진 몫의 가나안 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업의 땅은 각 지파에게 할당되었지만 믿음의 싸움으로 쟁취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신약 시대의 성도들도 골로새서 1:12 에서 보듯이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한 자격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기업의 부분”이라는 말은 기업의 ‘몫’ 혹은 ‘배당’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각자가 받을 유업의 몫을 위해 믿음을 발휘하고 여러 역경을 참으며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유업의 상은 단순히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다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유업을 받는 성도들의 자세를 근면과 믿음과 인내의 삶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 아니므로, 여러분의 행위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성도들을 섬겼으며, 또 지금도 섬기고 있습니다. 여러분 각 사람은 같은 열성을 끝까지 나타내서,소망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믿음과 인내로 약속을 상속받는 사람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히 6:12.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의 헌신을 잊지 않고 상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히 6:10, 15, 17). 유업의 상은 현세에서도 받지만 대부분 내세에서 받습니다(히 11:33, 39). 우리는 현세에서 주를 위해 사는 삶의 질에 따라 현세와 내세에서 상급을 받습니다. 상급을 받으려면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에는 많은 유혹과 고난이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11절) 되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이 기도는 유업을 바라는 자들이라면 날마다 올려야 할 기도입니다. 꾸준한 인내가 없이는 아무도 유업의 상을 위한 싸움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꾸준해야 유업을 받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징의 하나가 꾸준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다가 그만두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처음에는 열심을 내다가 얼마 가지 않아 식어버립니다. 용두사미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국가에서 하는 일도 그렇고 개인간의 관계에서도 꾸준성이 부족한 것이 우리들의 약점입니다.

◑ 신자들은 선행에 꾸준해야 합니다.

◑ 사랑과 순종의 삶에 꾸준해야 합니다.

◑ 기도와 성경 공부에 꾸준해야 합니다.

◑ 하나님과의 교제에 꾸준해야 합니다.

◑ 복음의 사상에 꾸준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신실한 것입니다. 신실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셋째, 유업의 상을 받으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히 11:6). 이 점에서 아브라함은 우리들의 대표적인 모델입니다(히 6:15). 성경에 왜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게 길게 실려 있습니까? 그는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를 보여 주는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소위 말하는 이신칭의의 모델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는 선언을 받은 자입니다. 그는 또한 우리들이 어떻게 유업의 상을 받는지를 보여 주는 모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열거된 수많은 인물들은 아브라함을 위시하여 모두 하나님께서 유업의 상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 모세는 장차 받을 상을 기대했기 때문에 애굽의 보화를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모욕을 참고 바로 왕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출애굽할 수 있었습니다(히 11:26-27).

5. 유업의 상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유업을 부지런하고 꾸준한 믿음과 인내로 받습니다. 그래서 유업은 우리 스스로의 열심과 믿음과 노력의 대가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모든 좋은 것들은 모두 은혜의 선물입니다.

◆ 우선 우리에게 유업을 주시기로 계획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 그리고 그 유업을 받을 수 있도록 자격을 부여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 또한 우리가 유업을 받을 수 있는 열심과 믿음과 노력도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활동에 의한 것입니다.

▣ 그래서 우리들이 힘써 노력하여 얻은 유업이라도 우리들이 벌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빚을 지신 분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도 무엇을 갚을 의무나 책임이 없으십니다. 우리들의 선행과 봉사와 거룩한 삶은 하나님의 종들로서 마땅히 행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우리들은 무익한 종들에 불과합니다(눅 17:7-10). 아무리 순종을 잘 한다고 하여도 자신의 의무를 행한 것에 불과합니다. 또한 우리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고 하여도 결함과 여러 흠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믿음과 인내와 근면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부족한 선행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흠 없는 유업으로 갚아 주신다는 것은 은혜의 차원입니다.

우리들의 불완전한 선행과 순종에 대해서 하나님이 상을 주시는 것은 우리들이 온전한 유업을 받을 만큼 훌륭해서가 아니고 부족하나마 자녀들의 선행을 기뻐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후한 속성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업의 상은 내 힘으로 버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의 힘을 따라”(11절) 우리들이 힘쓸 때에 받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상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살도록 격려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기에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선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자랑할 것도 없고 보상을 청구할 권리도 없습니다. 우리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죄와 사망으로부터 영원한 구원을 거저 받았습니다. 우리들이 만약 이 큰 은혜를 우리의 선행으로 갚아야 한다면 전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행하는 모든 선행은 끝 없는 감사에 대한 극히 작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업의 축복들을 나누어 주십니다. 유업의 상이 “무익한 종”(눅 17:10)의 당연한 봉사와 부족한 헌신에 대한 보상이라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혹자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구원받은 것만 해도 감지덕지한 일인데 상은 무슨 상이란 말인가?” 그런데 누가 아무 공로가 없이 구원을 은혜로 거저 받고서 상까지 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왜 상급 이야기가 나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고 약속하시고 후히 베풀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라고 하시는데 안 받겠다고 하거나 이를 무시하려는 것은 결코 칭찬 받을 자세가 아닙니다. 사양하는 것이 반드시 미덕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하나님의 선한 뜻을 물리치는 것은 겸손이나  깊은 영성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을 지신 일도 없고 아무런 상을 주실 필요도 없다는 데에 모두 동의할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고 충분합니다. 그래서 그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고 누구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원해서 기꺼이 주시려는 것을 우리가 힘써 받기를 원하십니다. 유업의 상은 최초의 구원 이후에 오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후한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받는 유업을 통해서 영광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크며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넘치는 것인지를 웅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급은 우리 자신들도 자랑스럽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라면 결국 하나님께도 영광이 돌려지는 일입니다.

어떤 분은 또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나는 상을 바라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 상이 없어도 나는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다.” 이것도 역시 자기 생각입니다. 상을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심판대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고후 5:10; 롬 14:10). 심판대가 왜 필요합니까? 상과 벌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상이 없어도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옳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훌륭한 자세이지만 비현실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은혜로운 방안을 마련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동기   부여의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누구도 동기 부여가 인간을 움직이게 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 하나면 다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십자가가 최대의 동기 부여임을 항상 기억하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능력에 비추어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연약함을 동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가 최대의 동기 부여가 되어야 하지만 연약한 자녀들에게는 또 다른 종류의 격려가 될 수 있는 동기 부여도 필요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더 많은 동기 부여를 주신다고 해서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하나님은 much more의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의 동기 부여가 부족하기라도 하듯이 상의 동기 부여까지 붙여서 주십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연약함을 크게 동정하고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도 하나님의 후하심을 깊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상의 동기 부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의도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격려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내 생각과 내 경건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뜻입니다. 그런 자는 한 가지 자신의 생애에서 평생 동안 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을 주시는 하나님의 후한 은혜를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마땅히 올려야 할 감사를 하지 않는 것은 그 만큼 자신의 믿음 생활에서 영적 공백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빈 공간입니다. 하나님께서 기꺼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상을 받기 위해 힘쓰는 것은 나에게 오는 개인적인 유익에 앞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6. 유업의 상에 대한 가르침이 주는 교훈들은 무엇입니까?

유업은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선행과 헌신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선행과 사랑의 섬김을 기억하신다고 하셨습니다(히 6:10).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것은 갚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주를 위해 사는 삶은 결코 상실되지 않습니다. 주 안에서 맺는 모든 수고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열납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인해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들의 기쁨으로 돌아옵니다.

그럼 유업의 상이 무엇인지 궁금할 것입니다.

성경은 상의 종류나 성격에 대해서 우리들이 알고싶은 만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크게 격려를 받고 용기를 낼 수 있는 동기를 부여 받을 수 있는 만큼의 가르침들은 충분히 있습니다.

▶ 유업의 상은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주님께서 우리들의 선행을 인정하시고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냥 말로만 칭찬하시는 것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런 말씀 자체가 보상입니다. 나의 믿음과 오래 참음과 충성을 주님이 인정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큰 축복입니다. 우리들의 삶을 가장 보람되고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님께서 나를 알아보시고 인정해 주시며 칭찬해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이로부터 ‘참 수고했다’는 한 마디만 들어도 기쁘고 그 동안의 여러 고통이 사라지는데 하물며 주님으로부터 받는 칭찬이겠습니까? 너무도 큰 위로와 기쁨이 될 것입니다.

▶ 상은 기쁨과 확신을 갖게 해 줍니다. 내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이런 삶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린다는 확신이 있고 심령의 평안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상에서 체험할 수 있는 유업의 상입니다.

▶ 상은 사후 천국에서 더 큰 책임과 영예를 가져 옵니다. 지상에서 하나님을 충성과 신실로 섬긴 자들은  보다 많은 봉사를 맡게 될 것입니다. 사후에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하나님을 찬양하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갱신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주님과 함께 온 우주를 상속받고 만유를 다스리는 일을 할 것입니다. 우리 각 자에게 할 일이 주어질 것입니다. 천국에서도 소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같은 일을 동일한 레벨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지상에서 주님을 어떻게 섬겼는지에 따라 상이한 일을 맡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동일할지라도 각자가 받는 상급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7. 유업은 우리들의 신앙 자세에 변화를 가져 옵니다.

Ω 상의 약속은 우리들이 지상에서 미래의 약속을 기대하며 주님을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섬기게 하는 동기부여가 됩니다.

Ω 유업의 상은 우리들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재원과 기회를 낭비하거나 무시하면서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변호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롬 14:10-12).

Ω 우리들의 고난을 바르게 보는 일을 돕습니다.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된 성도들은 고난도 함께 받으면서 주를 섬깁니다(롬 8:17). 그러나 현 세상에서 받는 고난은 장차 우리들이 누릴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롬 8:18-21). 성도의 영광에 포함될 유업의 상은 주를 위해 사는 삶의 고통을 견디게 하는 영적 강심제입니다.

우리들은 장차 완전하게 갱신될 이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왕처럼 다스리는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주 예수의 재림으로 죄와 죽음과 불의의 세상이 온전히 새롭게 될 때에는 고난의 삶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까지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가 주는 유업의 축복들을 환난 속에서 기대하며(행 14:22)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Ω 유업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과 소망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현실을 장기적인 안목에서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게 합니다. 하나님은 시련과 역경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의 축복들이 우리들에게 더욱 깊이 체험되도록 계획하셨습니다(살후 1:5). 우리들이 환난을 기쁨으로 여겨야 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행 5:41; 벧전 4:13; 약 1:2-4). 우리들은 현세에서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절실하게 체험합니다. 이것은 미래에 받을 유업의 영광을 지상에서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Ω 이러한 유업의 체험은 하나님 나라의 무궁한 축복들을 더욱 깊이 즐길 수 있는 영적 용량을 넓혀 주고 그 은혜를 더욱 사모하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들의 성품을 승화시키고 더욱 견디게 하며,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하고, 성령의 능력을 더 한층 기대하게 합니다(벧전 4:13-1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벧전 1:13).

Ω 유업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은혜로운 속성을 깨닫게 합니다.

유업 교리는 무엇보다도 성도들에게 격려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박해에 대한 가르침의 문맥에서 하늘 상급을 언급하셨습니다(마 5:12). 그래서 베드로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을 즐거워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주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우리들도 그 영광에 참여하고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벧전 4:13-16; 5:1-4).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봉사와 헌신과 사랑의 삶을 자신의 권리로서 얼마든지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삶은 성도의 마땅한 책임이며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럼에도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온 우주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하며 새 하늘과 새 땅에 포함된 형언할 수 없이 좋은 축복들을 상급으로 주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안에서 한 때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던 우리들에게(롬 5:10; 엡2:3) 놀라운 자비와 친절을 베푸십니다. 이러한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과 주를 위한 헌신에 박차를 가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받은 구원의 축복이 얼마나 후한 것인지를 새롭게 깨닫게 합니다.

▣ 우리들이 받은 구원은 단순히 사후에 천국에 들어간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구원 이후에 날마다 주님의 칭찬을 받으며 하늘에 보물을 쌓아둘 수 있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믿으면  주님을 보다 더 기쁘게 해 드리려고 힘쓸 것입니다. 그런 삶에 대해서 후히 갚아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은 과연 우리들의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유업 교리는 일반 성도들이 많이 오해하거나 혹은 기피하는 편입니다. 복음주의 신학자들도 대부분 이 주제를 꺼립니다. 그러나 이제는 신학적으로도 유업 교리가 성경에 나온 대로 제자리를 찾아야 하고 일반 신자들도 유업 신앙을 회복해야 할 때가 되고도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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