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상에 대해서 가장 많이 언급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여러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상에 대해서 자주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상을 바라면서 주를 섬긴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상에 대한 바울의 대표적인 본문들은 고린도전서 3:5-15;  빌립보서 3:12-16; 고린도전서 9:16-27 입니다. 이제 고린도전서 9장 전체의 문맥에서 바울이 언급한 상급 사상을 살피기로 합니다.

바울은 이 본문에서 매우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는 사역자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에 보수를 기대하는 것이 일반 사람들이 일을 하고 보수를 받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상식적인 관례와 율법의 예시를 통해 강조하였습니다. 율법에서는 소까지도 일을 할 때에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는 자가 없고 포도 농사를 짓고서 그 열매를 먹지 않는 농부도 없으며 양 떼를 기르고 그 젖을 먹지 않는 목자도 없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자도 성전에서 나오는 양식을 받아 삽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도들처럼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도 복음을 전하고 사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습니다(고전 9:1-13). 또한 주님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고전 9:14). 교인들이 목회자의 생활비를 책임지는 것은 마땅한 의무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포인트는 자신에게 복음으로 생활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이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상에 대한 언급을 하였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바울이 보수를 받지 않는 것에 대해서 나쁘게 말했습니다. 그가 사도의 자격이 없다거나 혹은 자신을 보수를 받기에 합당한 복음 교사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중상하였습니다. 물론 바울은 그런 이유에서 사례비를 안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연약한 형제들이 있을 때에는(고전 8:13) 이런 저런 문제로 그들의 양심에 해(害)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양보한다는 원칙을 내세웠습니다. 그가 그렇게 사는 것은 이러한 약자 위주의 원칙에 대한 좋은 실례가 되었습니다.

1. 바울은 돈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상은 바라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고전 9:15).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12절)고 자신의 권리인 사례를 받거나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봉사에 대한 상은 기대하였습니다.

바울이 “내 자랑하는 것”(15절)이라고 한 말은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자랑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서 ‘최고의 기쁨으로 삼는 것’, ‘매우 기뻐하는 것’ 혹은 ‘큰 기쁨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복음 사역이 어떤 이유에서도 방해를 받을 수 없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즉, 그가 큰 기쁨으로 여기는 상을 놓칠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는 것을 자신의 삶에서 매우 귀한 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상을 바라고 산다고 하면 금방 거부감을 일으키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적이고 고상해야 할 봉사에 상리적(商利的)인   뉴앙스가 풍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인정’이나 ‘칭찬’이라는 말로 바꾸어 읽으면 즉시 부정적인 측면이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상’이라는 용어에 대한 편견이 깊음을 증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자체에서 사용하는 말을 본문의 문맥 속에서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일반적인 편견이 들어가면 성경의 본뜻을 오해하고 맙니다.

2. 바울은 상을 하나님의 속성의 한 표현으로 전제하였습니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17절).

바울은 자원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물론 그는 이방인을 위한 복음 사역자로서 소명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진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섬겼습니다. 그는 때로는 자신과 동료들의 생활비를 위해 자기 손으로 천막을 깁는 험한 일을 하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복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였습니다. 그는 개인의 유익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권리까지 포기하고 주를 섬겼습니다. 그는 이런 봉사를 하나님께서 보상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의 복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23절).그는 오직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불편이나 오해나 중상을 당하는 것을 개의치 않고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고전 9:22)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약한 자들에게는 그들의 연약에 맞추었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자신도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처럼 되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여 몇 사람이라도 구원할 수 있다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수고하게 만들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진해서 기쁘게 헌신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서 그런 봉사에 대해서 후한 상을 주시는 분임을 믿었습니다. 그 같은 헌신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고 상을 받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이 하나님의 상을 위해 달음질하기를 권면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24-25절).

바울은 당시의 육상 경기를 비유로 들면서 신자들은 금방 시들고 썩는 나뭇잎으로 만들어진 월계관을 위해 달리는 자들이 아니고 썩지 않는 월계관을 받기 위해 달린다고 했습니다. 썩지 않는 월계관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상입니다(24절). 바울은 또 상 받는 자의 자세를 언급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절제하며 훈련하는지를 알렸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27절).

이 말은 구원을 상실하고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극기와 단련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힘쓴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행위와 무관합니다(엡 2:8-9). 본문의 주제는 구원이 아니고 상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15에서 구원과 상을 구별하였습니다. 그는 구원은 잃을 수 없지만, 상은 잃을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실격이 되어 상을 받지 못할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3. 상을 얻는 일은 우리들에게 영원한 영향을 줍니다.

바울이 상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했다는 말은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분명 상은 받아도 좋고 안 받아도 좋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상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26절) 자기 몸을 철저하게 단련한 동기였습니다. 그렇다면 상에 대한 우리들의 부정적인 편견은 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상을 주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힘써 달리는 자들에게 상을 주기 위해서 기다리십니다. 우리들에게 잘 달렸다고 칭찬하기 위해서 손에 썩지 않는 월계관을 들고 우리들을 격려하십니다. 상 주기를 기뻐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주의 백성들은 상 받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처럼 상을 향해 달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잘하였도다’ 라는 칭찬을 받고 못 받는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마 25:21, 23). 헬라 경기의 월계관과는 달리, 승리한 성도들이 받는 면류관은 영원한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날은 영속되지 않지만, 심판의 결과는 영원합니다. 상을 받은 자는 영원한 상을 받은 것이고, 상을 못 받은 자는 영원히 못 받은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는 예수님의 칭찬과 영예는 영원히 지속되거나 아니면 영원히 상실됩니다. 이것은 매우 엄숙한 일입니다.

한편 바울이 사용한 당시의 육상 경기와 영적 달리기 사이에는 유사점도 있지만 상이점도 있습니다. 헬라의 육상 경기에서는 우승자는 한 명이었습니다(24절).  그러나 영적 달리기에서는 각자의 레벨에 따라 많은 성도들이 제각기 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일반 경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다 상을 받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바울 같은 사도도 자신이 상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했다는 말을 진지하게 경청해야 합니다. 신약에서는 신자들의 삶이 그리스도의 강권하는 십자가 사랑 (고후 5:14-15)과 주를 두려워하는 것(빌 2:12; 히 10:31)으로 동기부여가 되도록 엮어져 있습니다. 주를 두려워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살지 않아서 징계를 당하거나 상을 잃어버릴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상실 가능성을 놓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고 주님의 부활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영원히 된 것입니다. 한 번 의롭다고 선언된 칭의의 구원은 취소되거나 상실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은 게으름과 불신과 참지 못함으로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신을 철저하게 단련하였고 주의 명령을 따라 거룩하고 헌신적인 삶을 살려고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우리는 첫 구원만 받고 끝날 것이 아니고 구원 이후에 있는 상도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한 뜻이며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 상을 바라고 살았다면 우리들도 그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4. 어떤 사람이 상을 받습니까?

바울의 삶을 보면 누가 상을 받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당연한 권리도 내려 놓고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22절) 하였고, 자진하여 기쁘게 복음을 희생적으로 전하였으며(17절), 실격이 되지 않도록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하였습니다(27절). 그는 복음 선교사의 사명을 받았지만 의무의 한계를 넘어서 넘치게 수고하며 숱한 고난을 당하였습니다(고전 4:9-13). 하나님의 상은 의무의 한계선을 넘을 때에  옵니다(16절). 바울은 자신에게 의무로 지워진 일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의무의 한계선을 넘어서 행하는 일을 구별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받은 것을 너무도 큰 특권으로 여겼고 사실상 자신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16절).

그는 자신이 받은 사명을 귀히 여겼을 뿐만 아니라 자원해서 의무의 한계선을 넘어서는 봉사를 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한 상을 받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것이 아닙니다.하늘나라에서 여러 배의 사례금으로 보상받기 위해서 고린도교회에서 돈을 받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직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자신의 권리도 양보하고 고난도 달게 받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후한 성품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선한 뜻에 따라 사랑과 겸비로 주를 섬기는 자들을 외면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부터 자기 백성들에게 갚아 주시는 공의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만일 선과 악을 갚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무슨 힘으로 주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겠습니까? 하나님이 갚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드러내고 자기 백성들과의 별다른 사랑의 관계를 다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원하는 복을 많이 받아내기 위해서 주를 열심히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압도된 자들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집중합니다. 놀랍게도 주님은 우리들을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작은 봉사까지 심지어 목마른 어린 제자에게 물 한 잔 준 일까지 기억하시고 갚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마 10:42, 새번역).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그 돌보시는 방법이 가장 의미 있고 실질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상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돌보심 속에서 하늘 아버지의 깊은 부정을 느끼고 우리들을 향한 아버지의 세밀한 관심에 감격의 고개를 숙이며  주님을 더욱 신뢰하는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상을 주시는 하나님은 상업적인 동기 부여를 하시는 분이 아니라 영적인 교제의 풍성한 차원 속으로 우리들을 초대하고 하늘의 축복을 한껏 즐기게 하시는 분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을 믿었기에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의무의 한계를 넘어 깊은 사랑으로 주를 섬겼습니다. 바울은 상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자신의 의무의 한계를 넘는   헌신으로 주님을 섬겼기에 언제나 주님의 임재와 능력을 체험하였고 의의 면류관이 그를 위해 준비된 것을 확신하며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딤후 4:7-8).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고 최고의 신학자였습니다. 그의 상급 사상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것으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 예수의 복음과 그분의 진리만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상을 믿었고 그것을 향해 달렸습니다. 주님에 대한 불절의 사랑과 하늘 아버지의 후한 성품과 깊은 영적 교제에 대한 확신으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빌 3:14) 달려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그의 모범을 따라 살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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