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의 단물

왕하 2:19-22

 

“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21절).

생명이 없는 종교가 있는 곳에는 물이 썩어서 열매가 없는 여리고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교회는 존재하지만 영적 능력은 없습니다. 외적으로는 모든 것을 잘 갖추었지만 생명과 진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현대 기독교의 특징은 “위치는 좋으나” 영성은 좋지 않습니다. 겉보기에는 갖춘 것이 많지만 실제로 있어야 하는 말씀의 능력과 영성의 빛은 희미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강단의 설교는 더 이상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드러내지 않고 십자가의 복음으로 죄인의 양심을 일깨우지 않습니다. 예배는 주 예수를 경배하기 보다는 교회당을 경배하고, 종교적 분위기의 흥을 돋구는 프로그램과 성공주의와 돈을 경배합니다. 우리나라 교회는 “위치가 좋은” 마당에서 울타리를 치고 자기들끼리 먹고 떠들며 자기 집만 치장하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발전하다가 마침내 사회로부터 등돌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1. 교회에서 썩은 물이 흐를 때에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회개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며 거룩한 삶을 일궈내지 못합니다. 부패가 잠들지 않고 영혼이 살아나는 갱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구원에 대한 이해가 천박하고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이 체험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심리적인 분석과 일시적인 심장 마사지 정도의 치유가 복음의 은혜인양 성행합니다. 심장 수술을 받아야 할 중환자에게 가슴을 슬슬 마사지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교회는 안마 시술소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겠습니까? 영혼의 질병과 아무 상관도 없는 설교 마사지를 받고서 은혜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피부 두께만큼도 들어가지 못하는 치유력으로 환자의 영혼을 고쳐 준다고 선전합니다. 이것은 복음의 치유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로는 수확을 망치는 죄악의 쓴물을 생명의 단물로 바꿀 수 없습니다.

복음적인 치유는 유혹과 비방과 속임수와 고통과 영적 분별에 약한 자들을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복음적인 내적 치유는 복음의 사상으로 무장시키고 성령의 능력으로 악을 이기며 주 예수의 임재를 체험하게 하고 세상을 극복하게 합니다. 우리 나라 교인들의 특징의 하나는 너무도 쉽게 상처를 받고 자신의 연약을 한탄하는 것을 일종의 영성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거두는 수확이  어떤 것들입니까? 열매가 익지 않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수확의 시기에 열매가 익기도 전에 다 떨어지고 맙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다고 하지만 부활 생명의 승리는 좀체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의 위치는 좋을지 몰라도 땅은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크리스천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날 박해를 그치고 크리스천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정치적인 이해 관계를 배제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은 나라를 운영하는데 절실히 필요한 지혜와 올바른 자세가 크리스천들에게 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당시의 한 문헌에 나오는 크리스천의 모습은 현대 교인들과 대조적입니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정결하다….그들은 시련을 받을 때에 견디고 수고할 때에 인내한다. 그들은 모욕을 당할 때에 참으며 강도를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귀기가 쉽다. 죽음 자체도 가볍게 여겨 그리스도의 순교자가 된다.”

말씀의 능력이 없으면 인간의 지혜와 말로써 치유를 시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현대 교회의 강단 메시지가 세속적 심리 요법과 성공 신학의 옷을 입고 축제를 연 것은 벌써 오래 된 일입니다.  그러나 복음 사상을 따르지 않는 것들은 언제나 실패합니다. 여리고는 위치는 좋았으나 폐수가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좋은 장소에 위치했을지라도 썩은 물이 항상 흘러 열매가 없었습니다.

교회에는 비싼 십자가는 걸려 있어도 고난의 십자가는 성도들의 삶 속에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여리고의 위치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위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위치는 생명이 아닙니다. 겉모양은 가면으로 위장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수가 흐르는 것입니다. 생수의 강물이 흐르는 성령의 임재와 진리의 말씀이 들리는 곳이라야 열매를 맺습니다. 여리고는 보기는 좋았어도 질병과 죽음을 수확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럼 폐수가 흐르는 땅에서 어떻게 생명수가 흐를 수 있을까요?

  1. 여리고의 치유책은 무엇입니까?

   첫째, 엘리사는 소금이 상징하는 것으로 비범한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엄청난 수원에 비하면 소금 한 그릇이 무슨 효험이 있겠습니까? 소금이 물의 근원에 영향을 미칠 리가 없습니다. 소금은 상징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정화와 부패 방지의 소금은 복음이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새 그릇”(20절)은 깨끗한 용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그릇은 신령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기에 더러우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 그릇은 토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써 정결하게 되면 주님의 복음을 담는 신령한 용기로 쓰임을 받습니다. 복음의 소금은 죄의 부패를 막고 새 삶의 맛을 냅니다. 복음은 소금처럼 단순합니다. 십자가의 구원의 메시지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주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합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모든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주 예수의 사랑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새 삶의 열매를 거두기 시작합니다. 죄와 부패로 썩고 죽어가는 불치의 영혼은 소금이 상징하는 복음에 의해 영원히 살아납니다. 복음은 단순하고 쉬워서 세상의 비웃음을 당합니다. 소금 정도에 불과한 복음이 어떻게 세상의 죄와 부패를 치유하고 열매를 맺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지혜보다 낫습니다(고전 1:25). 마실 수 없는 여리고의 오염된 물은 소금과 같은 복음에 의해 생명수로 변하였습니다.

  둘째, 엘리사는 문제의 근원지로 갔습니다(2절).

엘리사는 직접 물 근원으로 가서 소금을 뿌렸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악의 근원에서 치유를 시작하십니다. 죄인의 마음부터 갱신시킵니다. 마음이 부패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셨습니다(막 7:20). 마음이 정화되지 않는 한, 거룩한 삶의 열매가 달릴 수 없습니다. 외적인 개혁이 있어도 승리의 삶은 보장되지 않습니다. 죄가 마음에서부터 제거되지 않으면 죄의 의지가 삶의 방향타를 쥐고 통제합니다. 원천이 부패하면 시냇물을 필터로 정화시키는 것은 근본적인 치유가 아닌 임시 방편의 땜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갱신시킬 때에는 강력한 치유의 소금을 뿌리십니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요? 다음과 같은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 잠자던 영혼이 깨어나고 영적 자세에 변화가 옵니다.

☞ 새로운 영적 욕구와 열망이 마음을 채웁니다.

☞ 하나님을 새롭게 섬기려는 동기가 삶을 지배합니다.

☞ 죄에서 돌이켜 거룩한 삶을 향해 나아갑니다.

☞ 영적 눈이 밝아져서 복음의 빛을 즐거워하며 주님을 사모합니다.

☞ 목회자들에게는 강단 사역에 새힘이 솟고 영적 권위가 회복됩니다.

  셋째, 엘리사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2:21).

엘리사는 독물을 정화시킨 후에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단지 주님의 치유력을 전달하는 통로라고 겸손히 밝혔습니다. 이것이 소금 그릇을 잡은 자의 당연한 자세라야 합니다. 내 손에 잡힌 소금 그릇은 그 자체로서는 무력합니다. 그러나 소금 그릇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은 강력합니다. 물을 고친 것은 엘리사 자신이 아니고 ‘여호와’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 물을 고쳤다” 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독물이 생수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소금을 뿌린 자의 손에 능력이 있었던 것처럼 자기를 드러내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중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사역을 하면서 중죄를 범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체로 세상을 섬기면서 죄를 짓는다기 보다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죄를 더 짓습니다. 특히 복음 사역자들은 자신을 숨기고 주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겸비한 자세를 항상 지녀야 합니다. 아무리 일을 잘하고 능력 있는 사역을 했어도 무익한 종에 불과합니다. 우리 자신의 많은 허물과 숱한 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에도 우리들이 이모저모로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의 덕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감사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 자기를 낮추면서 주를 섬겨야 합니다.

넷째, 엘리사의 처방은 복음의 효과를 예시합니다.

소금은 자기의 할 일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이제는 여리고 주민에게 물로 인한 죽음과 흉작의 재앙이 닥치지 않았습니다. 여리고는 다시 생명수를 마시며 번창하였습니다. 비로소 여리고의 좋은 위치가 땅의 풍성한 수확과 일치가 되었습니다. 여리고 재건에 대한 여호수아의 저주의 선포(수 6:26)는 또 다른 여호수아에 의해 제거되었습니다. 사실상 여호수아와 엘리사는 같은 의미의 이름입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가 구원이시다’는 뜻이고, 엘리사는 ‘하나님이 구원이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에 저주를 선포하였고, 두 번째 여호수아(엘리사)는 저주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영원한 마지막 여호수아(헬라어. ‘예수’)이신 예수님께서 여리고의 독물이 생수로 바뀌었듯이, 인간의 쓴 마음과 죄의 독을 십자가의 복음으로 치유하고 생수의 강물이 흐르게 하셨습니다(요 7:38).

인간에게 내린 죄로 인한 재앙은 아무도 고치지 못합니다. 인간 문화는 죄의 부패 속에서 날마다 죽음을 손짓합니다. 하나님을 등진 세상은 날마다 독물을 마시면서 죽어갑니다. 이 세상은 복음의 생명수를 마시지 못하면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는”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은 인류의 재앙을 십자가의 아들 위에 쏟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대속의 희생을 믿는 자들에게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느 13:2) 하십니다

 

                                          ***

 

 

 

 

코리아 위클리(2015.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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