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 강해(2)

엘리야의 명령에 불복한 엘리사

열왕기하 2:1-14 

소개.

인생의 최종점을 넘어가려고 하는 자는 누구나 진지합니다.  아무도 자신의 죽음을 장난처럼 대하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큰 획을 긋는 개혁 선지자로서 자신의 삶을 마감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의 곁에는 그의 사역을 계승할 엘리사가 있었습니다. 엘리야도 엘리사도 영원한 고별의 시간이 문턱에 이른 것을 알았습니다. 본문은 엘리야가 승천하기 전에 자신의 후계자인 엘리사와 동행할 때에 있었던 이벤트를 기록한 것입니다.

본 에피소드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엘리야가 엘리사와 함께 길갈에서 출발하여 요단 강까지 가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시험과 헌신에 대한 내용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엘리야가 승천하는 것을 엘리사가 목격하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성령의 사역과 ‘오는 세대’의 비전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 스토리는 우리 신자들이 어떤 자세로 무엇을 기대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합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사역을 떠맡기 전에 테스트를 받아야 했습니다.

엘리야는 마지막 길을 가면서 엘리사의 동행을 원치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엘리야는 길갈에서 출발하여 벧엘과 여리고를 거쳐 요단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그를 따르는 엘리사를 보고 따라 오지 말고 현장에 머물라고 했습니다. 그가 길갈을 떠나서 방문한 벧엘과 여리고는 선지자 생도들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아마 그들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사를 대동해도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엘리사가 함께 감으로써 그의 후계자로서의 위상이 높여졌을 텐데도 엘리야는 번번이 엘리사를 떼어 놓으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도 번번이 엘리야의 지시를 듣지 않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이것은 얼핏 보면 스승에 대한 노골적인 불순종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시의 형태를 띠고 오는 시험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이 때로는 우리를 떠보기 위한 것인지 아닌지를 잘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험인 경우에는 명령을 반대로 행해야 합니다. ‘여기 머물라’ 는 명령을 받았으면 ‘머물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해야 올바른 반응입니다. 혼란스럽게 들릴지 모릅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말씀을 통해서 잘 배우지 않으면 실수하기 쉽습니다.

엘리야는 왜 엘리사를 이곳 저곳으로 끌고 다녔을까요? 그냥 자신이 죽을 곳에 가서 엘리사를 조용히 부르고 유언을 하면 좋은 텐데 말입니다. 우리는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준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2:2).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2:4)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2:6)

엘리야는 자신이 가는 곳을 매번 알렸습니다. 그는 길갈에서 시작하여 벧엘, 여리고, 요단의 순서로 한 단계씩 자신의 목적지를 알렸습니다. 이것은 매우 시사적입니다. 이 장소들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숨쉬는 곳이었습니다. 길갈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진을 치고 첫 번째 작전 본부로 삼았던 곳이었습니다. 벧엘에서 야곱은 꿈에 꼭대기가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를 보았고 하나님으로부터 그 땅을 유업으로 약속 받았습니다.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의 함성으로 무너진 가나안의 첫 성이었습니다. 요단 강은 이스라엘 백성이 건널 때에 물이 멈추었던 곳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와 계시를 크게 체험했던 장소들을 마지막으로 방문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구속의 장소들을 둘러보고 자신의 사역을 마감한다는 의미에서 엘리야에게 매우 뜻 깊은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들의 일부를 이러한 장소들에서 보호하시고 엘리야의 방문을 지시하셨습니다. 이것은 한 때 깊은 침체에 빠져서 죽기를 소원했던 엘리야가 지상 사역을 마치면서 자신의 사역이 헛되지 않음을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장소들을 방문하는 것은 엘리사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체험했던 계시의 장소들을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언약 백성을 이끌어 가시는 구원의 하나님께 자신을 일치시킬 수 있느냐는 도전이 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로서의 엘리사의 소명과 결의를 테스트하는 일이었습니다. 엘리사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2:2).

[교훈과 적용]

엘리사는 엘리야를 길갈에서부터 줄곧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는 가는 곳마다 좌절과 실망의 말만 들었습니다. 엘리야는 어떻게 해서든지 기회만 있으면 의도적으로 자기를 야박하게 떼어 놓으려고 하는 듯하였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 가면서 받은 격려가 무엇입니까?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너는 여기 머물라’고 하고서 자기 혼자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어떻게 느꼈을까요? 너는 이제 고만하라는 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주님을 섬기는 일에서 많은 실망과 좌절의 계곡을 지납니다. 엘리야는 일찍이 밭을 갈던 엘리사에게 나타나서 그의 겉옷을 던졌습니다. 그 때로부터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가 되어 그를 여러 해 동안 충성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엘리사는 더 이상 필요한 존재가 아닌 듯하였습니다. 이제는 그만 따라와도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고 계속해서 가는 곳마다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얼마나 섭섭한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엘리사가 여기서 그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낙망했을 것이고 더 이상 엘리야의 과업을 이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너는 여기 머물라’고 한 말은 엘리사가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한다는 결의를 확고부동하게 보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가 맹세하면서 엘리야를 떠나지 않겠다고 한 말은 엘리사 자신의 불절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그럼 엘리야가 왜 엘리사를 떼어 놓으려고 했을까요?

어떤 주석가들은 엘리야가 광야의 선지자였기 때문에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서 죽기 전에 조용히 자기 시간을 가지려고 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엘리야의 말이 엘리사의 투신을 테스트하기 위한 시험 장치라는 점을 간과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그리고 여리고에서 요단 강에 이르기까지 매 단계에서 포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포기할 수 있는 자유와 기회를 주십니다. 이러한 자유와 기회가 없다면 테스트를 받는 것은 무의미할 것입니다. 엘리사는 도중 하차할 수 있는 자유와 기회가 있었지만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기를 원하시는 성도의 참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이 닥치면 도중에 손을 떼기를 원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를 할 정도가 되면 자신의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이것은 있는 힘을 다하여 자신이 갈 수 있는 데까지 간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어려움이 반복되면 그만 힘이 빠지고 맙니다.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재는 넘을수록 험하고, 내는 건널수록 깊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우리는 길갈에서 그냥 주저 앉고 싶고, 벧엘에서 일이 끝나기를 빕니다. 우리는 벧엘을 간신히 지난 후에는 여리고로 이어지는 길은 다시 쳐다보기도 싫습니다. 더구나 여리고 다음에 요단 강이 기다린다고 하면 차라리 죽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매 단계가 곧 종점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 오랫동안 기도드렸는데도 응답이 없어 고통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약속을 받고 믿음으로 행했는데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한 적이 있습니까? 다시 가까스로 힘을 내어 시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도 없고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도 없어 괴로워한 적이 있습니까? 최선을 다했음에도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낙망하여 드러누운 적이 있습니까? 앞뒤가 꽉 막힌 듯한 지점에 이르면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통감합니다. 하나님께서 고만 따라 오라고 하시면 낙망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시험하셔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테스트하신 목적은 그가 상상도 하지 못한 복을 내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손에는 시험지를 쥐시고 다른 손에는 축복을 쥐고 오십니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테스트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리아 산에서 외아들의 가슴 위에 칼을 꽂아야 했던 그 무서운 시험이 어떤 축복을 낳았습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창 22:16-18).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상상할 수 없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의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씨가 곧 아브라함의 육신적 후손으로 태어나실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엘리사는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며 엘리야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할 정도로 전적인 헌신을 하면 놀랍게도 하나님 자신이 맹세하시고 복을 약속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엘리사에게 내린 축복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모든 선지자들 가운데서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기적의 사역들은 예수님의 은혜 사역의 성격을 내다보게 하는 커다란 화살표였습니다. 쓴 물이 단물로 바뀌고, 빈 그릇이 기름으로 채워지며, 죽었던 아이가 살아나고, 솥에 들어간 죽음의 독이 거두어지며, 나병이 치유되는 기적들은 모두 예수님의 은혜 사역의 특징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복된 사역은 결코 그냥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와 함께 요단 강 가에 설 때까지 맹세하고 또 맹세하면서 모든 시험을 다 통과하였습니다. 요단 강이 그 앞에서 갈라진 것은 이러한 테스트의 과정을 거친 후였습니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을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목표며 목적이며 보람이며 소망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전도자였던 웥치만 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자신을 위해서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원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큰 뜻을 지닌 자들입니다. 이 큰 뜻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합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기로 예정된 자들입니다(엡 1:3-7). 이 놀라운 비전이 있기 때문에 성도의 삶은 엘리사처럼 맹세의 헌신과 불절의 결의 속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코리아 위클리 01.28.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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