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9:19-21

엘리사 선지자에 대한 스토리는 엘리야 선지자의 마지막 사역과 함께 물려 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사역을 이어받을 자였습니다. 그는 엘리야가 이세벨의 위협을 받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광야에서 죽기를 소원하며 기도하던 때에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새로운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엘리야 선지자가 어떻게 해서 엘리사 선지자를 그의 후계자로 부르게 되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목숨을 빼앗기로 맹세한 이세벨의 살의에 질려 광야로 도주하였고 이어서 호렙 산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와 소명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는 이제 새로운 비전을 안고 호렙 산에서 받은 소명에 따라 다메섹 방향으로 요단 계곡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영적 침체의 가뭄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메마른 땅은 단비로 적셔지고 새 소망과 수확의 날을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신령한 사역을 맡게 될 후계자를 생각하며 가벼운 걸음으로 아벨므홀라 마을에 도착하였습니다(왕상 19:16). 우리들의 침체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과, 우리에게 여전히 말씀하신다는 사실과, 그리고 아직도 우리에게 행할 일이 있음을 소명으로 알게 될 때에 치유됩니다.

농부들은 여기 저기에서 밭 일을 갈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여기서 자기 아버지의 밭을 갈고 있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던 칠천 명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이세벨을 피하여 호렙 산의 한 동굴에 있을 때에 하나님에게 이렇게 불평하였습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10, 14). 그 때 여호와께서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고 하셨습니다. 이제 엘리야 선지자는 그 칠천 명에 속하는 남은 자 한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칠천 명의 여호와 경배자들]

엘리야는 하나님께 자기만 남고 다른 선지자들은 다 죽임을 당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침체에 빠지면 사물을 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이 떨어집니다. 침체의 한 증상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자신이 아는 사실도 덮어 두고 현재의 자신의 궁색한 처지에만 골몰하였습니다. 비근한 예로써, 그는 아합의 궁내대신인 오바댜가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백 명씩 굴에 숨기고 돌보았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실상 오바댜는 이 사실을 엘리야에게도 알렸습니다(왕상 18:13). 그럼에도 엘리야는 여호와 편에 있는 사람이 자기 혼자뿐이라고 한탄하였습니다. 그럼 왜 칠천 명의 여호와 경배자들이 모두 숨어서 살아야 했을까요? 물론 이세벨의 학살을 피하기 위해 동굴에서 피신한 선지자들도 있었고 혹은 평범하게 살면서 보다 나은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남은 칠천 명이 모두 엘리야와 같은 소명을 받은 공적 리더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 종교가 퇴색되고 박해가 심한 때에 자취를 감춘 것은 최선의 행위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자신들이 속한 곳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여호와를 섬겼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알 숭배를 하지 않는 자들이 여기 저기에 있음을 아셨습니다. 엘리사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엘리야가 될 수는 없습니다. 엘리야는 한 사람이면 족합니다. 누구나 동일한 소명을 동일한 방식으로 받지 않습니다. 국가적인 무대에 직접 나서서 바알 숭배에 맞서 싸우는 리더도 필요하지만 등단하지 않는 배후의 인물들로 남아 있으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자들도 있어야 합니다. 칠천 명 가운데 상당수는 배도와 악행의 때에 여호와 종교가 힘을 얻을 날을 기다리며 아마도 엘리야의 사역을 뒤에서 기도로 후원하면서 자신들의 처소에서 주의 때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엘리사가 새로운 사역의 부름을 받았을 때 이들 중에 일부는 선지 학교로 모여들어 이스라엘의 영적 재건에 헌신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칠천 명을 남겨 두시고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영적 부흥을 위해 기여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긍정적인 기여가 되도록 역사하십니다. 사람의 눈에 불리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라도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섭리하십니다.

[엘리사는 어떤 상황에서 부름을 받았습니까?]

엘리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한 부르심이 있을 때까지 일상 생활에 충실하였습니다. 그가 소명을 받은 장소와 시점은 겨릿소를 몰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은 깊은 산속에서나 장시간의 기도를 할 때에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적 편견입니다. 자신의 주어진 환경에서 충실하게 일하면서 살 때에 소명을 받는 것이 정상입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겨릿소를 몰고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것 저것을 다 해 보아도 일이 잘 안 되니까 목회자가 되어야 하겠다든지 혹은 목회가 고상하게 보인다든지, 세상에 나가서 일할 자신이 없다든지 혹은 다른 일은 하기 싫고 하나님의 사역을 하면 잘 될 것 같아서 뛰어드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또한 소명과 은사가 있더라도 주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확실한 소명과 인도가 없는 자들에게 쉽게 목사 안수를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소정의 신학 교육과 시험을 거쳤으면 거의 전원이 목사가 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도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고시에 합격했어도 목회자로서의 자질이 없고 확고한 소명의식이 없으면 목회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설교의 은사가 없는 목회자의 말씀을 듣느라고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매주 고통을 당하며 억지로 예배를 보아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을 전하는 은사도 없고 준비도 되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강단에 서는 것은 본인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 불행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한 소명을 받지 않은 사역자들의 무력한 설교와 비성경적인 목회로 인해서 엄청난 손실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칠천 명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 스스로 소명을 만들어 내고 무리하게 교회를 하려고 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사역에로의 소명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에 전혀 무관심하거나 은사도 없는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칠천 명은 우선 극도의 바알 숭배 문화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때를 기다리며 이스라엘의 갱신을 갈망해 왔던 자들이었습니다. 엘리사도 소를 몰고 농사를 지으면서 하나님의 일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엘리사의 겉옷은 아무에게나 떨어지지 않습니다. 소명과 능력의 겉옷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간절한 마음으로 주를 찾는 자들 위에 떨어집니다.

[엘리사가 희생해야 했던 것들]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부리며 밭을 갈 만큼 큰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재산과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궁핍한 삶을 살 것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그는 앞으로 일꾼들을 부리는 주인의 위치에서  엘리야를 섬기는 종의 위치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악독한 이세벨의 추적을 당하는 엘리야 선지자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해야 했습니다.

엘리사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는 고향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기를 좋아하는 성품이었습니다. 그는 소명을 받았지만 부모와의 결별의 시간을 갖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는 가정의 기쁨을 알고 부모의 정을 아는 자였습니다. 그 앞에 떨어진 엘리야의 겉옷은 부모와 가족과의 석별을 의미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소명으로 집을 떠나면 다시 고향에 들리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소명을 받고 엘리야에게 부탁한 한 가지 청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모와의 작별 인사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사실상 이러한 석별이 모든 하나님의 종들이 갖는 체험입니다. 갈릴리 어부들에게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그들은 배도 그물도 다 놓고 주를 따라 나섰습니다(마 10:37; 눅 12:13-21). 주를 따르는 일은 무엇인가 나에게 속한 것을 두고 떠나는 길입니다.

[교훈]

하나님의 소명을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려 놓고, 버리고, 잊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일 수 있고 경력일 수 있습니다. 혹은 친구들이나 결혼의 포기일 수 있습니다.  주를 따르는 삶은 내 것을 비우고 주의 것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을 받기 위해 세상 나라에 속한 것들을 제쳐 두는 자들은 “주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빌 3:8)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바울과 함께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 가노라”(빌 3:12)고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만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신령한 소명의 겉옷을 입고 주를 섬길 수 있습니다.

엘리야의 겉옷은 큰 책임을 의미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시작한 갱신 사역의 나머지 부분을 감당하는 중책을 맡은 자였습니다. 엘리사는 우상 숭배자들과 계속 싸워야 했고, 이방 나라의 침략을 막아야 했으며, 후진들을 길러야 했고, 백성들의 갈급한 필요를 채워주면서 언약 백성들을 여호와의 길로 인도해야 했습니다.

우리들은 엘리야보다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복음 사역의 일을 맡은 자들입니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마 28:19-20). 이 분부가 곧 예수님의 겉옷입니다. 복음 사역자는 물론이고 모든 신자들이 복음을 위해 신령한 주의 겉옷을 받아 입고 주를 섬겨야 합니다. 이 일에 고난이 있고 내가 맡아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소명은 슬픈 것이 아니고 기쁜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골 1:24).

엘리사는 부모와 친척과 이웃과의 작별에 많은 시간을 쓰지 않은 듯합니다. 그들과의 작별에 대한 기사가 간략하게 나왔는데 그의 부모도 엘리사의 소명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한 듯한 흔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큰 농사를 누가 짓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선지자들치고 고난을 겪지 않은 자들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엘리사의 부모들은 이러한 위험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쩌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의 슬픔을 견디며 하나님을 신뢰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성경은 자주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해서 침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의 나라를 위해서 그런 희생을 참는 자들에게 후히 갚아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히 6:10).

엘리사는 즉시 친구들을 모으고 잔치를 열었습니다.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왕상 19:21). 이것은 과거의 삶과의 단절입니다. 엘리사는 자신의 농사 장비였던 ‘소의 기구’를 불살랐습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내가 과거에 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던 ‘기구’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소의 기구’들은 소를 위한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주님이 주시는 신령한 장비에 의존해야 합니다. 소와 소의 기구는 엘리사의 옛 삶의 방식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소를 삶고 밭 가는 기구를 불태운 것은 과거의 삶의 방식으로부터 탈피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새로운 농기구를 잡았습니다. 그의 손에는 소의 기구가 아닌 엘리야의 겉옷이 잡혀 있었습니다. 옛날 바이킹들은 새로 개척한 땅에 정착할 때에 자신들이 타고 온 배를 불살랐다고 합니다. 더 이상 배를 타고 다니면서 이곳저곳을 약탈하지 않고 한 곳에 머물면서 정상적인 생업을 누리면서 산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실 때에는 과거에 연연해 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제에 속한 농기구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지 불살라야 합니다. 옛 삶의 습관을 끊어야 하고 다시 돌아가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왕국에 작별을 고하지 않고는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성공하려면 다른 목표들과 얽혀서는 안 됩니다(히 12:1). 갈라진 마음으로는 주의 일에 헌신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눅 16:13). 우리들은 엘리사의 경우처럼 불태우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의 슬픔보다 신령한 새 출발을 기념하는 잔치의 무드 속에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자신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신 칠천 명의 남은 자들과 일치시키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때를 기다렸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언젠가 주를 위해 바알 경배자들과 맞서서 싸울 용의가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그들을 대표하여 제일 첫 번째 소명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의 뒤로 다른 ‘남은 자’들이 바알과 싸우는 그의 소명에 합세할 것이었습니다. 칠천 명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명이 있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남은 칠천 명들이 부패한 우상 숭배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구출하고 여호와 종교의 순수성을 회복시키는 일에 앞장서 나왔듯이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부르고 계십니다. 추락된 교회의 위상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각 성도들의 참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들을 날마다 부르고 계십니다. 엘리사의 겉옷은 지금도 자신의 농기구를 불태우고 복음의 길을 따라 주님을 새롭게 섬기려는 자들 위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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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1. 14

올랜도 코리아 위클리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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