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이름을 받는 사람들

요한복음 1:35-51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요 1:35-37).

본 항목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그와 함께 있었던 또 다른 제자와  베드로와 빌립 및 나다나엘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세례 요한의 두 제자 중에서 한 사람은 안드레였고 다른 사람은 아마 요한이었을 것입니다.  이 두 제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지적하는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즉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두 제자들은 평범한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흔히 그런 범인들이 깊은 믿음과 영적 통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지만 요한을 떠나 예수님께로 갈 만큼 자기 스승의 말에 순종하였고 예수님의 와서 보라는 초대에 주저 없이 응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증언하였습니다. 그럼 요한의 두 제자는 배신자였을까요? 세례 요한의 다른 제자들도 많았지만 그들은 예수를 따르지 않은 듯합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공적으로 증언한 것은 이것이 두 번째였습니다(요 1:29, 36). 그럼에도 안드레와 다른 한 제자의 전향만 언급되었습니다. 사실상 세례 요한의 다른 제자들은 오랜 기간 그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스승에게 충성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더 큰 진리 앞에서는 충성의 대상이 바뀔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은 자신보다 더 큰 빛을 소개하였고 자신은 그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끈도 풀기를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요 1:27). 그럼에도 대부분의 그의 제자들은 요한을 떠나 예수께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에는 그것은 의리가 없는 일로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의 라이벌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요한에게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서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간다고 보고하였습니다(요 3:26). 그 때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요한의 제자들은 계속 요한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투옥되었을 때에도 그를 지지하였습니다(마 11:2).

이런 충성은 인간적으로 보면 의리가 있어 보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제자들의 충성이 예수님에게로 옮겨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드레와 다른 한 제자는 세례 요한의 뜻을 잘 헤아리고 바른 결정을 내린 자들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변심을 한 것이지만 이들은 자기 스승의 사역의 목표에 기여한 자들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도록 길을 닦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생각하고 우리들의 충성의 대상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이해 관계나 의리나 인정 때문에 더 나아가야 할 하나님 나라의 길을 주저하거나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들의 최종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위해서 더 나아가야 할 자를 자기 밑에 붙잡아 두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스승과 제자 관계를 우리는 재 정의해야 하고 재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잠정적인 충성의 대상과 영구적인 충성의 대상을 구별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한시적인 스승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영원한 스승입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로 옮겨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자들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지판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아무리 훌륭하고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을지라도 우리들이 주 예수를 따르지 않으면 그들의 소명이 완취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주 예수를 따라 갈수록 우리들의 길잡이 스승들은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은 그런 스승들을 칭찬하십니다. 주님은 세례 요한이 “켜서 비추이는 등불”(요 4:15)이며 여자가 낳은 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자라고 하셨습니다(마 11:11).

 

우리는 무엇을 찾습니까?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요 1:38).

우리들이 주님에게로 나아가면 돌이켜 보시고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계신 곳에 함께 머물며 배우고 섬기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39절). 주님을 알고 배우기를 원하는 자들을 주님은 거절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그를 잡으러 온 로마 병정들과 성전 경비병들에게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요 18:4)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무덤 곁에서 울고 있던 마리아에게도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요 20:15). 이 질문은 매우 시사적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찾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찾습니다. 자기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을 찾습니다’ 라고 하지 ‘나를 찾습니다’ 하고 수소문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의 두 제자들은 무엇을 찾고 있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내가 찾는 것은 나에게 중요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중요하거나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찾는 것은 나에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날마다 무엇을 찾아 다닙니다. 돈을 비롯하여 직장, 결혼, 주택, 명예, 건강 등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필요하고 중요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것들이 우리 인생의 참 목적과 의미를 주는데 얼마나 기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영구적인 가치를 지닌 것을 찾아야 하고 궁극적인 의미를 주는 것을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메시야를 찾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은 이 세상과 나를 구원할 메시야를 찾기 전에는 아무것에도 영구적인 만족을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찾아야 할 궁극적인 실체입니다. 주님은 메시야를 찾는 자들에게 자신을 공개하십니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다 와서 마시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39절). 그 날 두 제자들이 주님과 가졌을 대화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이 주님의 초대를 받아들였을 때 자신들의 일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드레는 그의 형인 시몬을 찾아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41절)고 증언하였습니다.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자들은 입을 다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계시거나 숨어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거처를 알려 주시고  원하는 자는 그와 함께 머물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던 안드레와 다른 한 사람은(40절) 그들이 찾던 구주 예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날은 그들의 생애의 최고의 날이었습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무엇을 찾으면서 삽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비록 내 손에 들어와도 나를 영원히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은 나의 죄를 씻을 수 없으며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우리가 찾는 것을 준비해 놓고 ‘와서 보라’고 청하십니다. 그래서 그의 초대에 응하여 가 보면 주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이 우리를 먼저 찾으십니다. 잃어버린 양은 스스로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을 찾지 못합니다. 길 잃은 양은 목자가 찾아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세상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당신은 와서 보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응한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고 있습니까? 당신은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당신을 위해 무슨 일을 행하셨으며 또한 앞으로 당신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진리와 보살핌을 받으면서 그분을 왕으로 모시고 살 때에만 진정으로 당신이 추구하는 행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깊은 통찰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시선은 베드로의 과거를 보셨고 현재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어떤 사람이 될 것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보시고 장차 게바로 불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게바는 반석이라는 의미입니다.   당시의 베드로는 반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충동적이었고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새 이름을 주십니다. 새 이름은 새 출발을 의미합니다. 새 이름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신들의 운명이 주님의 은혜로 변화될 것을 의미합니다. .

하나님의 축복은 개명(改名)과 함께 옵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되었고, 사래는 사라가 되었으며,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조상들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과연 반석으로 다른 형제들에게 힘이 되었고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으며 반석 같은 믿음으로 주님을 끝까지 섬기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새 이름을 주시고 그 이름에 합당한 자들로 재창조하십니다. 우리들이 주님과 함께 계속 머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녀들이 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당신은 ‘와서 보라’는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였습니까? 주님과 함께 머물면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찾습니다. 주님은 자기와 머무는 자들에게 자신을 야곱이 꿈에서 본 하늘에 닿는 사다리의 실체라고 알려 주십니다.

코리아 위클리 201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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