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심 산과 에발 산의 교훈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여호수아 8:33).

이스라엘은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기 전에 길갈에서 요단 강 도강을 기념하고 기념석을 세우며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제 아이 성을 점령한 후에  이스라엘은 더 이상의 작전을 중단하고 온 백성을 그리심 산과 에발 산으로 집결시켰습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율법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간의 범죄로 언약을 어겼기 때문에(7:11, 15) 하나님과의 언약의 의무를 온 백성 앞에서 다시 확인시키기 위해서 모세가 명령한 장소로 모였습니다. 언약은 구약에서 여러 번 갱신되었습니다. 언약의 내용 자체가 변경된다는 의미의 갱신이 아니고 언약 백성의 의무를 상기시키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겠다는 결의를 거듭 다짐한다는 의미에서의 갱신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낭독되면 “모든 백성은 아멘” (신 27:15-26)으로 응답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교훈입니다. 여호수아는 아이 성의 패배를 설욕한 후에 충천한 사기를 몰아 나머지 땅들을 점령하고픈 유혹을 물리치고 모세를 통해 주셨던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였습니다. 요즘은 사라져가는 전통이지만 교회마다 헌신 예배가 절기마다 들어간 때가 있었습니다. 새 언약 백성의 믿음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헌신을 때때로 거듭 다짐하는 것은 영적 갱신을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신자들이 영적으로 실패하는 근본 원인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말씀의 우선권을 제쳐놓기 때문입니다. 전투 후에 전열을 가다듬고 휴식을 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먼저 경배하고 말씀의 양식을 먹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모두 데리고 아이 성의 북쪽에서 약 20 마일을 행군하여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있는 세겜 땅으로 가서 특별 예배를 올렸습니다.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주는 의미]

왜 이 장소를 택하였을까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가나안에 들어갈 세대에게 사전 지시를 하셨기 때문입니다(신 27:1-8). 세겜 땅은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겜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고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야곱은 세겜 성읍 앞에 장막을 친 밭을 매입하였고 아브라함처럼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경배하였습니다(창 33:18-20). 그는 이곳에서 자기 권속들이 소유한 이방 신상과 장식품들을 땅에 파묻고 그들을 하나님께 재헌신시켰습니다(창 35:4). 나중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을 집결시키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하는 엄숙한 의식을 가진 곳도 세겜이었습니다(수 24:1).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눈 곳도 세겜의 수가라는 동네에 있던 야곱의 우물가였습니다(요 4:5-6).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은 세겜 지역에 있는 가나안의 지리적 중심입니다. 두 산의 산정에서 가나안 땅 대부분을 조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족장들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곳에서 그들에게 주기로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을 실제로 밟고서 언약의 말씀을 읽고 돌에 기록하는 의식은 매우 뜻 깊고 감격스런 일이었습니다. 이 두 산 사이에는 계곡이 있고 분지가 형성되어 음향 효과가 탁월하고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편 산 위에서 내는 소리를 다른 편 산에서 쉽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 산에서 율법을 처음 받았을 때처럼 번제와 화목제를 올리고 큰 돌들에 석회를 발라 율법을 새겼습니다(신 27:2, 8). 그리심 산 위에서는 율법에 기록된 축복을 낭독하고 에발 산 위에서는 저주를 낭독하였는데 백성이 모세의 지시대로 ‘아멘’으로 화답하였습니다(신 11:29; 27:12-26).이것은 언약 백성으로서 율법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강령이며 가나안의 새 삶을 이끄는 신정법임을 천명하고 다시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심 산은 순종으로 오는 하나님의 축복을 대변하고 에발 산은 불순종으로 오는 하나님의 저주를 대변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 두 산 중에서 어느 편에 서 있느냐에 따라 축복과 저주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그리심 산의 축복과 에발 산의 저주를  시식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따랐을 때 여리고 성에서 승리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을 때 아이 성에서 패배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곳에서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읽은 것은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기본 원칙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율법에는 순종의 축복과 불순종의 저주가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 제도에 대한 자세한 지시도 나옵니다. 제사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용서와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대속의 제사가 필요하였습니다.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은 속죄제를 드릴 아론도 함께 주셨습니다.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내다본 구약 시대의 예표적인 의식이었습니다. 제사 제도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되는 십자가 대속의 그림자며 화살표였습니다(갈 3:13).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축복과 저주가 서로 번갈아 가며 울렸습니다. 양 편이 서로 자기들이 속한 산의 축복과 저주를 외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심 산의 백성은 에발 산의 백성에게 자기들 쪽으로 오면 축복을 받는다고 외치고, 에발 산에 있는 자들은 그리심 산의 백성에게 자기들 쪽으로 오면 저주를 받는다고 외친 셈이었습니다.그 날의 이벤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잊을 수 없는 의식으로 각자의 뇌리에 깊숙이 새겨졌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율법을 일일이 다 낭독하였습니다(수 8:34; 비교. 행 20:27). 이제 이스라엘은 유업으로 쟁취한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빠짐없이 모두 들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이스라엘 국가를 세운다는 것을 국시(國是)로 삼고 이에 모두 아멘으로 응답함으로써 신정 국가로서의 틀을 공적으로 선포한 셈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우리들의 과거의 삶은 에발 산의 그늘 아래 있었습니다. 실패와 저주의 어둠에서 사망 선고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 정죄가 없습니다. 에발 산에서 그리심 산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롬 8:1-2). 예수님이 오셔서 에발 산의 저주를 십자가에서 다 받으시고 우리를 데리고 그리심 산으로 가셨습니다(골 1:13-14). 아직도 에발 산의 저주가 들리는 곳에 서 있는 자들에게 그리심 산의 축복이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과거의 삶은 황충과 메뚜기가 다 갉아먹은 삶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에발 산을 떠나 축복의 그리심 산으로 가면 두려워하거나 한탄할 필요가 없습니다. 죄와 불의로 잃어버린 땅은 나로 하여금 에발 산의 어두운 그늘 아래 머물게 합니다. 그러나 주 예수의 십자가 대속을 믿는 자들은 그리심 산의 축복으로 옮겨져서 소망의 삶을 회복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여호수아는 에발 산 위에 제단을 쌓았고 에발 산에서 율법을 돌에 복사하였으며 율법의 저주가 에발 산에서 선포되게 하였습니다(수 8:30-35; 신 11:29). 그럼 왜 에발 산에서 제단을 쌓고 저주를 낭송해야 했을까요? 에발 산은 저주를 대변하는 산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록된 율법의 모든 저주가 에발 산의 제단 위에서 사라지도록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올렸습니다. 번제는 죄의 속죄를 위한 것이고, 화목제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화평한 관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단은 불순종으로 저주를 받은 자들을 위해서 세워진 것이기에 에발 산 위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에발 산의 제단에 바쳐질 희생 제사의 원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한 몸에 다 받으시고 우리들을 구속하셨습니다(갈 3:13). 비유컨대 갈보리 십자가는 저주의 에발 산 위에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이 제단은 곧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우리들이 저주에서 축복으로 옮겨지도록 예수님이 제단이 되시고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모든 죄인들을 위해 준비하신 은혜의 제단입니다.

‘여호수아’는 ‘주님이 구원하신다’는 뜻으로서 ‘예수’와 동일한 이름입니다. ‘여호수아’는 히브리식이고 ‘예수’는 헬라식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예표는 실체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림자로서 윤곽을 드러내고 실체를 가리킵니다.

♣ 여호수아는 지도자로서 제단을 세웠습니다(30-31절).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제단에 자신을 바쳤습니다.

♣ 여호수아는 모세의 율법을 돌에 새겼습니다(32절).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으로 모세법을 대치하고 성취시켰습니다(마 5:17-48). 또한 그의 성령으로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 주셨습니다.

♣ 여호수아는 율법을 백성에게 들려 주었습니다(34-35절).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성경에 기록되게 하시고 성령의 조명으로 우리들에게 들려 주십니다.

♣ 여호수아는 단창을 들어 아이 성을 가리킬 때처럼, 여기서도 모세의 후계자로서 손색이 없음을 다시 한 번 보여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의 아들로서 새 언약 백성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유일한 구주이십니다.

한편, 에발 산에 쌓았던 제단은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수 8:31)이었습니다. 이 제단은 사람의 손이 가지 않은 자연석 제단이었습니다. 이것은 이방 종교처럼 사람의 손으로 다듬고 인간의 아이디어로 제물을 바치는 제사가 아님을 시사합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사상에서 나온 것들은 하나님의 제단에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제단은 하나님의 제단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구속의 제단 위에 하나님의 독생자가 희생 제물이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세우신 십자가의 희생 제물만이 죄인들을 정죄와 사망에서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리심 산의 축복은 생명을 의미하고, 에발 산의 저주는 죽음을 의미합니다(신 30:19). 죽음 대신 생명을 택하십시오.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를 믿으십시오. 우리들이 저주에서 축복으로 옮겨지도록 예수님이 용서의 제단이 되시고 에발 산의 저주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 생명을 그의 십자가 대속을 믿는 모든 죄인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모든 인간은 죄와 죽음의 세상에 태어나서 죄인으로 살다가 죄인으로 사망합니다(롬 3:9, 23).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인류는 사망의 저주 아래 있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어야 합니다. 자신이 사망의 저주 아래 있는 속절없는 인생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십시오. 나 대신 저주를 받으신 주님의 제단인 십자가로 나가십시오. 그리고 주 예수를 자신의 구속주로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사십시오. 이것이 죄와 사망의 정죄로부터 구출되는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강조되기 보다는 물질주의와  개인주의적인 세속 복음이 십자가 복음을 대치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의 손으로 장식된 제단들이 교회당을 채우고 있습니다. 말로는 인간의 공로나 행위가 아닌 은혜 구원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세속주의가 강대상과 신자들의 심령에 에발 산의 저주로 울리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그리심 산으로 옮겨가서 살지 않으면 에발 산의 저주가 항상 따라다닙니다. 여호수아서는 바알 종교로 타락해버린 사사기 시대로 이어집니다. 그들은 여호수아 시대에 온 백성이 모여서 가졌던 언약 갱신의 예배를 내버리고 바알 경배의 축제로 몰려갔습니다.

기독교 사상과 신앙으로 세워진 서구 사회는 급속히 퇴락하고 있습니다. 한때 교회 성장의 세계적 모델로 자랑삼던 우리나라 교회들도 엄청난 부패에 빠져 있습니다. 지금처럼 영적 갱신이 필요한 때는 없었습니다. 사사기 시대는 여호수아 시대에 이루어놓은 것을 뒤집는 영적 아간입니다. 에발 산의 저주는 아간의 망령들을 처단할 때까지는 우리들의 사회와 교회를 죽음으로 계속 인도하며 모든 것을 황폐하게 할 것입니다. 이처럼 절박한 시대에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의 영적 갱신을 위해 각자가 받은 소명이 무엇인지를 골똘히 생각해 보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주의 음성을 듣는 자들은 무덤에서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을 죽음의 땅에 뿌리는 부활 생명의 전사(戰士)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전사들의 무리에 속하고 싶지 않습니까?

코리아 위클리 06.25.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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