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종교란 신성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돈과 종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봅니다.  우리 나라 교회들은 다른 나라의 교회들에 비해서 돈을 많이 언급하는 편입니다. 헌금에 대해서 불편하게 여기는 신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헌금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신앙 생활에서 불편한 점이 늘 따라다닐 것입니다.

헌금 행위는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하고 끝날 일이 아닙니다. 교회 헌금에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헌금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구속주 하나님께 사랑과 감사와 헌신을 표현하는 일입니다. 또한 우리들이 세상의 맘몬 신을 부정하고 오직 주 하나님께 충성을 바친다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헌금은 우리들이 맡은 물질을 어떻게 지혜롭게 관리하면서 주님의 후한 성품에 따라 나누어 주는 일에 신실한지를 시험하고 점검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헌금을 복 받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거나 자랑이나 출세를 위한 공로의 표시로 삼거나 자원성이 없는 성가신 의무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자세는 재래 신관이나 세속적 가치관의 표출입니다. 주 하나님은 그런 헌금을 받지 않으시며 오히려 정죄하십니다(시 50:21).

우리들이 재래 종교나 세속 사상의 잔재들을 헌금 행위에서 몰아내지 않으면 교회는 헌금 문제로 세속화 됩니다. 헌금은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배우지 않고 행하면 무의미합니다. 헌금 이전에 교회 헌금이 재래 종교나 세속 사상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원론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1. 헌금이란 내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과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헌금은 실제적으로 생각하기 전에 원칙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헌금 행위에는 교회도 운영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정도의 상식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세상 만물의 주인이심을 주지시킵니다. 내 손으로 번 돈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바울은 묻습니다.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받아서 가지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두가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고전 4:7, 표준새번역).

교인이라면 하나님의 전적인 소유권을 머리로는 다 인정할 것입니다. 그럼 왜 손으로 가지 않습니까?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산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으로 나에게 개인적인 적용이 되어야만 내 손도 움직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물질의 소유주가 만물을 창조하시고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구주 하나님이심을 가슴 깊이 확지해야만 물질에 대한 자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내가 헌금을 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고백하는 셈입니다. “주님, 이 돈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다 주의 것임을 고백합니다(시 50:12).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이시며 복의 근원이심을 이 작은 헌금으로 표현하오니 받으시옵소서.”

2. 헌금은 청지기 직에 대한 실천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피조계를 돌보게 하셨습니다(창 1:28). 헌금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것을 어떻게 거두어들이고 사용하고 있는지를 상기시키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예배의 한 내용으로 제물을 바치게 하였고 현대 교회에서도 헌금을 예배의 일부로 간주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장하셔서 혹은 돈이 필요해서 헌금을 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시 50:13)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헌금을 하게 하신 까닭은 재물에 대한 우리들의 청지기 직을 점검하고 우리가 맘몬 신에 사로잡혀 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과 맘몬 신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해야 할 돈을 자신의 이욕적인 목적을 위해 제쳐 둔다면 헌금을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 하는 것입니다. 비도덕적인 삶을 살면서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헌금만 많이 바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종교적 의무를 다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재래 종교의 사고방식입니다. 청지기 직은 정직과 신실을 바탕으로 지혜롭게 물질을 관리하고 있는지를 점검받아야 합니다. 헌금을 하는 때가 곧 그런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3. 헌금은 헌신의 표현입니다. 

헌금 행위는 우리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신 주님의 삶을 본받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닮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지만 대체로 주님의 도덕적 성품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로 봅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장 두드러진 성품의 특징은 자기를 내어주는 헌신적인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헌금은 자신의 모든 것을 주께 바친다는 헌신의 표지입니다. 그래서 헌금을 할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자기 헌신을 기억하고 자신에게 이를 상기시켜야 합니다.

4. 헌금은 주께 대한 사랑과 감사의 표식입니다. 

우리들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 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돈 없으면 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 돈 하면서 사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자에게는 남에게 주고 싶지 않은 재물까지 기꺼이 넘겨 줍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구원을 받고 새 생명의 삶을 살게 되었다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상 헌금은 하라고 해서 하기 보다는 받은 사랑에 대한 합당하고 자연스런 감사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모든 헌금에는 자원성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감사한지도 모르고 내는 헌금은 무의미합니다. ‘감사 헌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용상 모든 헌금이 감사 헌금입니다.

사랑은 주는 일을 기뻐합니다. 사랑하는 자를 위한 것이라면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헌금 행위가 매우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게 된 자들은 헌금이 주님에 대한 사랑의 한 표현이기 때문에 전혀 불편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Q & A

교회에 다녀 보면 밖에서 생각했던 것과 상당히 다르거나 전혀 잘못 알고 있었다고 느끼는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 다니면 죄책감이 사라져서 마음이 편해지고 좋은 말씀만 들을 것이기 때문에 심적 위로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생기는 잡음 소리는 세상보다 더 요란한 경우도 있고, 평안을 느끼기 보다는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허다합니다. 물론 이 말은 다 옳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은 교회들도 많고 일반적으로 교회가 주는 심적이고 영적인 위로와 평강이 큰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교회에서 싸움과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의 하나가 돈 문제입니다. 개별 신자의 경우를 보아도 헌금에 대한 혼란과 갈등이 적지 않습니다. 자주 듣는 질문들을 몇 가지 다루어 보겠습니다.

Q 십일조나 감사 헌금 등에 왜 금액과 이름을 적어야 합니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A 우리들의 종교 문화에서 볼 때 신에게는 정성을 드려야 하는데 그 정성이라는 것에는 다분히 물질이 포함됩니다. 신은 경배자로부터 먼저 정성을 받아야 소원을 들어 준다는 것이 통념입니다. 그래서 우선 신에게 갖다 바쳐야 하고 그런 정성이 받아졌다는 것이 확인되어야만 헌금자의 마음이 놓입니다. 아마 이러한 재래 종교의 영향을 받아 교회에서도 헌금자의 이름을 대고 기도하는 전통이 생겼는지 모릅니다. 요즘은 이런 관습이 많이 없어진 편이지만 개인의 헌금 액수를 이름과 함께 밝히는 것은 성경의 관례가 아닙니다. 물론 교회나 개별 성도가 선한 일을 한 것을 성경에서 지목해서 칭찬하기도 했지만(왕하 4:8-10, 13; 요 12:3; 눅 7:4-5),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헌금자의 내역을 밝힌 일은 없습니다.

헌금은 원칙적으로 하나님과 개별 성도 사이의 은밀한 행위입니다. 재정 보고를 위해서 장부에 기록을 하는 것과 주보 같은 곳에 공적으로 싣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세금 공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 바친 헌금에 영수증을 발급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이 그 내용을 알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헌금은 경쟁이나 자랑이나 혹은 죄의식을 심어 주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과시적인 헌금 행위를 정죄하신 반면 아무도 보지 않는 과부의 가난한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막 12:41-44).

Q 헌금은 꼭 출석 교회에 내야 하는지요?

A 원칙적으로 그렇습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축복이 내리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매주 설교를 듣고 함께 경배하며 성도의 교제를 하는 곳으로서의 교회는 각 구성원의 참여와 책임을 요구합니다. 헌금은 이러한 공동체의 운영과 목적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고 자신의 책임을 준수하는 일에 속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소속된 교회에 헌금을 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교회를 내가 속한 지역 교회로 한정하면 자기 교회만 잘 되면 되는 줄 압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개별 교회가 모아져서 주님의 지체가 되기 때문에 범세계적입니다. 그래서 다른 교회에 헌금하는 것도 필요에 따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약한 교회를 지원하거나 선교 헌금을 하거나 기타 기독교 기관을 후원하는 것도 그들을 모두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 보기 때문입니다.

Q 십일조는 세금 공제 전에 해야 하나요 아니면 세금 공제 이후에 해야 하나요?

A 이 질문은 우리들이 헌금 문제를 얼마나 빈약하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일례입니다. 십일조는 수치로 생각하면 기계적이고 율법적이 됩니다. 1/10은 상징적인 수치입니다. 가령 쌀 열 가마를 십일조로 내는데 정확한 십일조가 되기 위해서 쌀 한 톨도 더 들어가거나 덜 들어가서는 안 되겠다고 여긴다면 난센스가 될 것입니다. 쌀 한 톨씩 헤아리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혹은 저울로 단다고 해도 조금 넘으면 그 만큼 덜어내고 조금 모자라면 기어코 채워서 확실하게 해야 하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십일조가 의식 이 되고 성가신 일이 될 것입니다. 구약에서 그런 식으로 십일조를 바치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농경 사회에서 그런 기계적인 정확성이 요구될 수 없었습니다. 배추 한 단을 십일조로 바칠 때에 그 배추가 다른 아홉 개의 배추와 크기나 무게가 다르다고 해서 잎사귀를 떼어 내거나 더 붙이거나 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철저하게 십일조를 했는데 칭찬을 받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십일조는 헌신의 표시가 아니고 자기 의(義)의 표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십일조의 본뜻을 곡해하였고 이를 의식화했으며 그것으로 다른 사람의 신앙을 내려다보는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십일조는 성전과 관계된 다른 모든 제사 의식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십일조는 율법의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일조에 대한 율법까지도 자신을 다 내어주는 십자가에서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매달 혹은 매해 수입이 있을 때마다 금액으로나 다른 형태의 물질로 성전에 가서 십일조를 바치셨다고 생각되십니까? 세금 전에 내야 할지 세금 후에 내야 할지를 놓고 고민하셨을까요? 십일조는 나의 목숨까지 포함해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고백하고 실천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 일을 가장 잘 수행하셨습니까? 누가 우리들의 모범입니까? 물론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방식대로 사는 것이 진정한 십일조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세금 전이냐 후냐 하는 식의 십일조가 아니고 일체의 헌금을 포함해서 우리들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입니다. 이 일은 율법에 근거한 십일조의 규례를 엄격하게 준수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구약의 십일조는 새 언약 아래에서의 십의 십조라는 온전한 성도의 삶으로 체현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산상설교의 수준에 따라서 예수님의 전적 헌신의 삶을 본받을 때에만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금 전이냐 후냐 하는 문제로 고민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십일조 정신과 목표에 대한 무지의 소치입니다. 신약 성도들에게는 구약의 계명들이 너무 낮은 수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계명의 문자적인 준수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와 주 예수의 헌신과 사랑의 모범에 따라 모든 일을 판단하고 결정하면서 살아야 하는 새 언약 백성입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갈 5:1, 18).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이 우리들의 신앙 생활의 표준입니다(갈 6:2).

Q 불규칙하게 수입이 생기는 경우 발생할 때마다 십일조를 내야 하는지요?

A 십일조는 산술적인 계산으로 그때 그때 따져서 내려고 하면 무리가 생깁니다. 신약 교회는 헌금에 대해서 원칙을 제시할 뿐 구체적인 실행 방식에 대해서는 구약에서처럼 루울로 정하거나 법제화시키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구제 헌금에 대해서 말할 때에 미리 준비하라든지 인색해서는 안 된다든지 혹은 각자 자기 마음에 정한 대로 하고 자신의 형편에 따라 행하라고 하는 정도의 원칙적인 지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강조한 것은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먼저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하라는 것이었습니다(고후 8-9장 참조).

신약 교인들은 구약의 예언과 상징들이 어떻게 예수님에 의해서 성취되었는지를 배워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면서 구체적인 문제에 부딪칠 때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 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만약 십일조를 포함한 율법의 규례들이 새 언약에 의해 어떻게 성취되었으며,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과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처음부터 바르게 파악했다면 헌금 문제로 야기되는 갈등과 불필요한 죄책감으로부터 진즉 해방되었을 것입니다.

Q 십일조를 낼 경우 생활고가 심해집니다. 그래도 십일조를 내야 합니까?

십일조가 아니라 일반 헌금이라도 형편이 어려우면 못 내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십일조를 꼬박꼬박 내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한 번의 예외도 두면 안 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들이 어떤 종류의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고후 8:12). 없는 자는 오히려 구제 대상이 되어 받아가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딤전 5:9, 16). 하나님은 세금 챙기듯이 헌금을 받아가시는 분도 아니고 무정한 집달리도 아닙니다. 십일조가 얼마나 신자들을 눌렀으면 생활고가 심할 때에 한 번쯤 예외를 달라는 식으로 호소한단 말입니까!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어떤 것이며 그 자유가 우리들의 신앙 생활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십일조나 헌금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죄책감과 불안감을 자초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이런 식으로 헌금 문제에 집착하면 헌금이 지향하고 드러내려는 거룩한 삶에 대한 순종을 소홀히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십일조만 내면 자기 할 일을 행했다고 보고 회개나 갱신이 없는 삶을 살기 쉽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는 그다지 중시하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와 기타 제물을 넘치게 바친 이스라엘 백성을 오히려 정죄하셨습니다. 그들이 제사에만 열심을 내었지 자비나 정의는 무시하고 부패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암 5:12, 21-24). 중요한 것은 제사보다 순종입니다(삼상 15:22-23). 여호와 종교는 제사 자체를 일차적인 초점으로 잡고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랑과 진리와 순종으로 다져져야 합니다.

(이 글은 2009년 9월호 두란노의 ‘빛과 소금’에 게재되었던 필자의 글입니다. 헌금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들은 필자가 쓴 ‘헌금 이야기’와 ‘하나님의 돈’ (목회자료사)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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