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붙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2-15)

이 말씀은 상급 교리를 다룰 때에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본문의 하나입니다. 상급에 대한 매우 중요하고 분명한 가르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본문은 상과 구원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상 혹은 유업이라고 하면 사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상과 천국 혹은 상과 구원을 동일시하는 것은 청교도들의 전통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상과 구원을 구별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대에서 공적이 다 불탄 사람은 상을 받지 못한다고 하면서도 구원은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칭찬을 받을 수 없는 자로서 마치 불 속에서 알몸만 겨우 뛰쳐나오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치르시고 부활하신 구주이심을 믿는 자들에게 값 없이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입니다(엡 2:8). 그리고 주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서 산 자들에게는 상이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상은 신자들의 선행에 대한 보상입니다. 따라서 첫 구원과 상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를 믿을 때에 이미 받은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때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고 죄 중에 빠져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우리들은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공로가 없고 거룩한 삶이 없을지라도 주 예수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롬 4:5). 주 예수께서 우리들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을 때에 경건하지 않은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롬 5:6, 8). 이것을 칭의라고 부릅니다.  칭의 구원은 한 번으로 받고 끝납니다. 우리들은 칭의를 우리의 선행이나 혹은 악행으로 개선하거나 더 악화시키지 못합니다. 칭의 구원은 일회로서 확정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행위와 아무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전적이고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는 것은 첫 구원을 받는 원리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첫 구원에는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상은 우리들이 선행으로 받습니다. 이 행함을 바울은 공적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내가 이런저런 일을 행하고 공을 세웠다고 해서 무조건 내게 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적 혹은 공로는 테스트를 받아야 합니다. 언제 이 테스트를 받을까요? 마지막 ‘그 날’ 곧 심판대 앞에서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공적으로 보여도 하나님의 눈에는 혐오스런 것이 될 수 있고, 사람의 판단에는 무익하게 보여도 하나님의 판단에서는 귀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모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각각 자신의 행위에 대한 엄정하고 정확한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이 때 무엇인가 받는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상을 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한 점을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구원을 우리의 행함으로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선악간의 행위는 상을 받고 못 받는 일에 대한 것입니다. 이 때 자신의 공로라고 내세울 수 있는 신자들의 삶이 다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만약 무가치한 것으로 판정되어 다 타버리면 그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주님의 칭찬에서 제외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를 구주로 믿었다면 구원은 잃지 않습니다. 본문의 포인트는 주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칭의의 구원을 받은 신자들은 주님의 칭찬과 상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구원과 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칭의에 대한 것이라면 상은 성화 혹은 거룩한 삶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놓고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하였고 야고보는 이것을 ‘행위에 의한 칭의’라고 불렀습니다(약 2:24).

둘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기초뿐만  아니라 상부 구조가 필요합니다.

기초는 위에 세우는 것이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올라가지 않는 기초는 제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딛고 서야 할 기초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이 교회의 기초가 되는 반석입니다. 이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할 상부 구조가 없으면 하나님의 집이 지어질 수 없습니다. 유다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라”(유 20절)고 하였습니다. 그럼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세워야 할 상부 구조물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한 마디로  주 예수의 모범을 따라 사는 신자들의 거룩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 2:6).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 복종하는 경건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의 복음을 위해 자신이 받은 소명에 신실하면서 시련을 견디며 성숙한 성품으로 일궈지는  삶입니다.

셋째, 상부 구조의 건축은 신자들의 책임입니다.

교회의 기초인 예수님은 영원하고 완전한 터전입니다. 누구도 이 기초를 다시 놓거나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기초 위에 세워지는 상부 구조물은 신자들의 행함으로 건축되어야 합니다. 이 일은 잘 할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습니다. 건축 자재가 다르듯이 각 성도의 신앙생활의 자재도 다양합니다.  금. 은, 보석도 있고 나무나 짚도 있습니다. 단단한 자재로 만든 벽돌도 있고 짚을 썰어 넣은 흙벽돌도 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각 성도의 삶의 결과를 금,은, 보석, 짚, 풀, 나무 등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 각자의 신앙생활에 귀하고 귀하지 못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금과 은이 다르고 풀과 나무가 다릅니다. 금과 풀이 다르듯이 은과 나무도 다릅니다. 저마다  질적 가치에 크고 작은 차등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믿음 생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가치를 두시는 것이 있고 무가치하게 보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로 두어도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무가치한 것들은 버려야 하고 가치 있는 것들은 보존해야 합니다. 이것을 가려내는 것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입니다. 심판대가 있는 것은 개인에게 책임이 있고 그에 따른 상벌이 있음을 전제한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행한 대로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마 16:27; 계 22:12; 시 19:11).

넷째, 심판 날에 상을 받는 교인들이 있고 상을 받지 못하는 교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고전 3:14)

상급 사상은 성경에 분명하게 담긴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것은 교회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성화론과도 직결되는 주제입니다. 이 주제를 가장 많이 가르치신 분은 예수님 자신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마 6: 4, 6, 18).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상을 약속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 22:12).

한편, 심판 날에 손실을 입고 상을 놓칠 교인들도 있습니다(고전 3:15). 이들은 마치 불 난 집에서 몸만 빠져 나오고 집 안의 물건은 다 타버리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 가지 유일한 위로와 안심이 된다면 그들은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상이 없는 구원은 결코 다행으로만 여길 일이 아닙니다.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고후 4:15)는 말은 나무나 풀이나 짚에 해당하는 삶을 살아도 구원을 받는 일에는 지장이 없으니까 안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불은 무서운 심판을 가리킵니다. 불 가운데서 받는 구원은 두려운 일입니다. 자신의 삶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고 하나님의 거룩한 눈이 극히 작은 일까지도 들추어낼 것입니다. 사람의 폐부를 통찰하는 하나님의 불꽃 같은 거룩한 시선이 우리 각자가 행한 일체의 행위들을 숨은 동기와 목적과 방법까지 밝히며 선악을 가려낼 것입니다(마 25:40).

악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있고,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롬 2:9-10).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롬 2:6)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신자들 가운데 예수님의 재림 때에 부끄러움을 당할 자가 있을 것을 경고합니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엡 5:6-7).

☞ 졸업반 학생들은 모두 졸업장을 받습니다.  그러나 모든 졸업생이 상장과 상품을  받지는 않습니다. 진정으로 구원을 받고서도 상을 영원히 잃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나에게 칭찬거리가 아무것도 없다고 하신다면 매우 민망하고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불순종의 자녀들에게 내리게 될 하나님의 노여움을 일시적이나마 체험하고(엡 5:6-7) 깊은 수치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는 말은 주님 앞에서 두려움과 수치와 후회로 몸을 움추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요이 8절)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은 신자들에게도 내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받은 우리들의 구원 자체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믿음의 행위를 판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세운 삶의 질이 과연 주님으로부터 ‘잘하였도다’ 라는 칭찬거리가 될 수 있는지를 판정받기 위해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게 서게 될 것입니다(고후 5:10).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신의 삶과 사역에 대해 솔직한 증언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0.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 앞에서 내보일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자신의 소망과 기쁨과 영광과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삶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의의 면류관을 기대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영광된 기대를 할 수 있는 삶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

[교훈]

고린도 교회는 사랑의 삶을 살지 않고 분쟁을 일으키며 세속의 가치관을 따름으로써 교회를 해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육적인 삶은 세상을 향한 나쁜 증거가 되어 기독교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하늘 상급까지 상실하는 위험에 놓이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상을 잃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예수 믿고 천국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에게는 상이 전혀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안 받아도 좋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천국을 자기 취향에 따라 택하겠다는 말입니다. 상 같은 것은 이기적이고 상업적인 것이므로 기꺼이 사양한다고 해서 자신이 더 영적이고 순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내가 상을 받고 안 받고 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자비와 사랑으로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하늘에 속한 유업을 믿음과 인내와 감사함으로 받을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상을 잃는다는 것은 상 자체보다도 예수님의 칭찬과 인정을 못 받는 일이므로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상이 없는 구원을 받는 자들은 주님의 심판대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주님을 실망시킨 자들은 주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는 기쁨을 박탈당하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마 25:21,23)이라는 칭찬을 못 받는 자들은 ‘악하고 게으른 종’(마 25:26)이라는 지적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만 믿으면 그냥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물론 주 예수를 믿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갑니다. 불 속에서 뛰쳐 나오고 자신의 모든 공로가 불타버렸어도 주 예수의 십자가 피로써 구속된 구원은 불타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너무도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의 십자가 희생으로 속죄함을 받은 자녀들을 불태우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풀과 나무와 짚에 해당하는 일체의 일들이 다 타 버린 자들은 비록 구원을 받을지라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국에 그냥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겪을 수 있는 수치와 부끄러움을 피하려면 주님이 우리들의 삶에서 칭찬하고 상을 주실 수 있는 일들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만 받으면 다 되는 것이 아님은 구원의 목표를 생각해 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신 후에 어디로 데리고 가셨습니까? 출애굽을 했으니까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양의 피를 각자의 문에 바르고 죽음의 천사로부터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바로 왕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다 끝났다고 보시지 않았습니다. 첫 구원은 다음 목적지로 가기 위한 출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목적지로 삼고 나아갔습니다. 가나안 땅은 천국에 대한 그림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아 누려야 할 유업의 땅에 대한 상징입니다. 가나안 땅은 구원을 받은 자들이 쟁취하여 그곳의 젖과 꿀을 따먹고 유업(상)으로 받아야 할 곳이었습니다. 이 땅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이 받아 누려야 할 상에 대한 실물 예시입니다. 구원의 목적은 단순히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고 유업의 획득을 위해 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그 다음 단계로서 유업의 상을 주시려는 것은 구원의 목적이 성취되는 일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구원만 믿고 유업의 상을 믿지 못하는 것은 구원의 스케일을 축소시키는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기뻐하시는 유업에 대한 선한 뜻을 등한시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상의 추구가 세속적인 사상이라거나 인간적인 동기 부여라는 생각에 편중되어 이것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목표에 속한다는 사실에 눈이 멀지 말아야 합니다. 상의 아이디어는 원래 인간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상의 동기부여가 타락되고 이기적인 인간들에 의해서 오용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명시되고 강조된 상의 가르침을 부인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상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자기는 천국에서 청소부가 되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좋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을 위해서 가지신 선한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뜻의 하나는 우리들이 모두 하나님의 칭찬을 받고 상을 받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 자체로서 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족하게 여기셔야 족한 것이지 내가 만족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의 기호나 사상에 맞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바라시는 일을 목표로 삼고 살아야 올바른 자녀들입니다.

[바울의 상급 소개 이유]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상을 많이 언급한 까닭은 두 가지 상황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봅니다.

첫째, 도덕적으로 너무도 해이하였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예수의 피를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신앙 생활에 절제나 단련이 없었고 죄에 대해서는 자유방임주의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의 신자들 가운데에는 불신자들도 범하기를 꺼리는 죄를 짓는 자들이 있었고 성찬이 집행되는 예배에서 무질서와 차별대우가 당연시되었습니다. 바울은 한 번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주를 섬기고 신자 생활을 해도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에 쐬기를 박고 단호한 경고를 해야 했습니다. 상에 대한 가르침은 커다란 격려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엄중한 경고도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받은 구원이 자유방임적인 신앙 생활로 퇴보하지 않고 유업을 향해 나아가도록 계획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의 피로써 구원을 받고서도 구원의 한 중요한 목표인 유업을 얻기 위한 거룩한 삶을 살지 않으면 주의 심판대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날이 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주지시키려던 교훈이었습니다.

둘째, 유대교의 공로 신학(merit theology)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인간의 순종이 당연한 대가로서 상을 받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순종이 물론 상을 받는 조건이지만 순종의 결과를 전적으로 자신의 공로로 간주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내 손으로 일해서 벌고 내 능력으로 어떤 기여를 했다고 해서 내가 다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바울은 또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전 15:10)이라고 했습니다. D.A Carson은 빌립보서 2:12-13을 이렇게 코멘트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일에 열매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속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들의 구원을 이룬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의 선한 목적에 따라 우리의 의지를 일으키고 행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은 내가 권리로 받는 보수가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이 많이 수고하며 부름의 상을 향해 힘껏 달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힘에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은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주의의 공로 신학과 배치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9-10).

▣ 바울은 상을 유대교의 공로주의 사상이 아닌 은혜의 관점에서 다루었습니다. 신자들은 자신의 상을 향해 달려야 하지만 자신의 공로를 내세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을 주지시켰습니다.  신자들은 야고보의 말대로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내려온다”(약 1:17)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나의 행위로 받는 상에서도 따져 보면 하나님께서 행하라고 명하신 것을 복종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물론 그런 행함이 가능하도록 능력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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