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본 시리즈는 이중수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강해지인 [양들의 식탁]에 실리고 있는 유업 시리즈의 글들을 모은 것입니다.   

[소개]

성경의 대주제의 하나는 유업입니다. 유업은 기업(基業) 또는 상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유업이라는 말을 상 혹은 상급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쓰면 과거의 우리나라 교회의 부흥사들이 유행시킨 그릇된 상거래적인 가르침의 영향 때문에 거부감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신학자들도 상급 교리를 다루기를 꺼려합니다. 상이라고 하면 행위에 대한 보상이라는 개념이 짙기 때문에 은혜 구원을 강조하는 종교 개혁의 전통에 맞지 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유업 주제는 종교 개혁 이후로 오래 동안 묻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최근에 와서 더러 유업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일어나고 있지만 아직은 주류 신학계나 개혁주의 강단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C.S. Lewis는 상급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약속된 상급에 대한 대담한 약속과 상급의 어마어마한 특성을 고려해 본다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이 너무 강하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무 약하다고 하실 것이다. 우리는 열정이 없는 피조물로서 우리에게 무한한 기쁨이 제공되었을 때, 어리석게도 먹는 것과 성과 야망 채우기를 위해 배회한다. 이는 마치 바닷가에서 휴일을 보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슬럼 가에서 형편없는 파이 만들기를 원하는 어리석은 아이와 같다. 우리는 너무 쉽게 기뻐한다”

(C.S. Lewis, The Weight of Glory and Other Addresses(Grand Rapids: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65, p.2).

그런데 유업에 관한 한, 문제는 우리들이 너무 쉽게 별 가치가 없는 것에 만족하는 것 이외에도, 유업 자체에 대한 인식이 너무도 빈약하거나 잘못된 것입니다. 유업(기업, 상)이라고 하면 신자들이 죽어서 가는 천국으로 여기거나 또는 누구나 믿음으로 받는 구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업은 단순히 사후 천국이나 구원 자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유업은 구원 이후에 오는 하나님의 갖가지 축복들입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축복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들로 가득합니다.

[유업 교리의 중요성은 무엇일까요?]

첫째, 유업 교리는 하나님의 후한 본성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아무런 빚을 진 적이 없습니다. 빚을 지고 은혜를 입은 쪽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피조물로부터 감사와 섬김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치 자식들의 효성에 대해서 부모가 고맙게 여기듯이, 자기 백성들의 선행에 대해서 감사하시며 마치 자신이 빚을 진 것처럼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빚진 자의 위치에 놓고 그 빚을 스스로 갚아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은 자녀들을 위한 하늘 아버지로서의 후한 성품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갚아 주시는 성품을 진술합니다. 갚아 준다는 것은 공의를 집행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행을 갚아 주실 뿐만 아니라 악행도 갚아 주십니다. 선행에는 선한 선물이 따르고 악행에는 형벌이 따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살후 1:7)라고 했습니다

한편,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선행을 갚아 주시는 것을 보면 이것이 매우 후한 은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18편에서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시 18:20-26).

본 시편은 하나님께서 공의로 사람들에게 갚으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악인의 길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하나님의 축복의 자리에 머물게 해야 한다는 권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갚음을 기대하면서 의식적인 노력으로 자신을 축복의 길에 서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상은 구원이 아닙니다. 본 시편의 저자인 다윗은 이미 구원을 받은 주님의 자녀였습니다. 상은 순종을 통해서 받는 축복들입니다. 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자동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거룩한 삶에 대한 지속적이고 결단 있는 투신과 힘씀에 의해서 받는 후한 은혜의 축복들입니다.

둘째, 유업 교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대한 우리들의 자세에 깊은 영향을 줍니다.

바울은 우리들이 주를 기쁘시게 해야 하는 이유로서 마지막 심판을 상기시켰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가장 엄숙한 말씀의 하나입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모든 사실을 자백하고 자신의 행위에 따라 상이 아니면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롬14:10-11).

크리스천은 심판 날에 지옥에 던져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까지도 신자들에게 ‘주의 두려우심'(고후 5:11)을 언급했습니다. 하나님의 행위 심판이 매우 엄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모든 수고와 선행을 갚아 주실 것이기에 마지막 날의 행위 심판은 신자들에게는 커다란 위로가 되고 주를 더욱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동기부여가 됩니다. 동시에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진지하게 의식하고 산다면 우리들의 나날의 삶에 적지 않은 변화를 일으킬 것입니다.

셋째, 유업 교리는 신자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신자는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결코 아무렇게나 살 수 없습니다. 무슨 죄를 지어도 다 용서되기 때문에 죄를 가볍게 여긴다면 유업 교리 속에 신자의 악한 행실에 대한 심판도 포함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신자들에게 여러 은사들과 기회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이것들을 주의 나라와 이웃을 위해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는 이기적이고 게으른 신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불신실한 자녀들을 충성되고 근면한 신자들과 동일하게 대하시지 않습니다. 불신실한 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잃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유업의 상을 향해 나아가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않은 일에 대해서 반드시 징계를 받고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의 칭찬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이 받은 소명의 은사와 기회와 능력을 사용하여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마 25:21, 23)이라는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이것은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칭의의 구원을 거저 받은 이후에 힘써 획득해야 할 하늘에 속한 상입니다.

[유업 교리는 비복음적인 사상이 아닐까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상을 주신다고 말하면, 우리들의 행위를 전제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거부감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거저 받는 은혜 구원에 너무도 익숙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편에서 하나님을 위해 자력으로 행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런 일들이 있다고 하여도 가치가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는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비복음적으로 들립니다. 그 뿐만 아니라 상을 바라는 것은 동기를 의심케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거저 받은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현인데 왜 상을 받아야 하느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들은 하나님을 섬긴 것에 대해서 당연한 의무와 책임으로 여겨야 하지 않습니까?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9-10).

상이라고 하면 남보다 더 많고 더 좋은 것을 소유하려는 이기적인 욕심이나 경쟁심의 뉴앙스를 풍깁니다. 그리고 상 받은 것에 대한 자랑이나 교만을 연상시킵니다. 더구나 ‘상급’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상에 등급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더욱 거부감을 일으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나 천국에 들어가는 것인데 어째서 천국에서 차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섬긴다고 하면서 상을 바란다면 처음부터 대가를 바란 봉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상 받기 위해서 교회 다니고 상 받고 자랑하려고 힘써 봉사하느냐는 식의 핀잔을 줍니다.

또한 상급과 관련해서 흔히 돌아다니는 말처럼 천국에 갔더니 누구는 금 면류관을 썼고 누구는 개털 모자를 썼더라든지, 어떤 사람 집의 잔디는 파랗고 또 어떤 사람 집의 잔디는 다 말라 죽었더라는 식의 이야기들이 상을 유치한 개념으로 일축해 버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상을 비유하는 것은 전혀 비성경적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상급에는 육적이거나 상업적이거나 혹은 모욕적이고 천박한 것이 없습니다. 상은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따라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사랑과 헌신의 삶을 산 신자들의 수고를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배려이며 하늘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는 격려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이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받는 박해에 대한 가르침에서 상을 언급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은혜의 복들을 누리기를 열망하십니다. 그 방법의 하나가 상의 소망을 갖게 함으로써 동기부여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동기부여의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인간은 동기부여가 될 때에 목표를 향해 힘차게 달려갑니다. 상의 동기부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며 그분의 칭찬을 받는 일이기에 신자들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믿음 생활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시련은 누구의 입에도 달지 않습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육과의 치열한 싸움입니다. 주님의 나라와 복음의 진리를 위해 살려면 타협의 유혹이 다가옵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분의 방식으로 살려고 하면 우리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언제나 실패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격려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칭찬하시고 하늘의 상을 주기 위해서 기다리신다는 약속의 말씀이 우리들의 늘어진 손과 흔들리는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부름의 상을 향해 달리게 합니다.

그렇다면 상급 교리는 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들은 상이 없어도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물론 섬기는 자들은 자신들의 봉사를 의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며 산다고 하여도 결코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로서 마땅히 행해야 하는 일들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희생에 비하면 우리들의 희생과 고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작은 봉사를 잊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히 6:10). 그리고 상까지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10:42).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주님의 선하심을 불필요한 일이라고 사양하거나 밀어내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성품에 대한 부정(否定)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께서 그런 성품을 가지시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늘 아버지께서 주기를 원하시는 복을 열망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는 것이 착하고 충성된 자녀들의 자세입니다. 주님의 제자에게 냉수 한 잔 주는 일까지도 잊지 않고 갚아 주시는(마 10:42) 하나님의 후한 성품을 찬양하십시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열들은 모두 하늘의 상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내가 그들보다 더 거룩한 듯이 하나님의 상을 불필요하다고 사양하는 자기 의의 겸손을 내려 놓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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