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11

 

예수님이 거룩한 삶을 사셨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거룩한 삶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거룩하다고 하면 매우 엄숙한 모습을 떠올린다. 거룩은 웃음과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룩하시다고 말하면 초월적이며 엄정하고 무서운 심판관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껄껄 웃으시는 모습을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더덩실 춤을 추시는 모습도 상상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웃으시는 것은 거룩한 성품에 비추어 볼 때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 예수님도 거룩하셔서 전혀 웃으시거나 즐거워하시지 않았을까? 신약 성경에는 예수님에 관하여 우셨다는 말은 있지만 웃으셨다는 말은 없는 듯하다. 예수님은 너무도 심각한 십자가 사역을 위해 온 마음과 정신을 쏟으셨기 때문에 웃고 춤추고 하는 일들에는 전혀 관심을 두시지 않은 듯하다. 어떤 이들은 크리스천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웃고 즐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신자들은 복음이라는 너무도 심각하고 중대한 진리를 위해 온 마음을 써야 하고 무서운 죄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설교 때에도 절대로 농담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물론 유익하지 못한 농담은 설교 때가 아니라도 삼가야 한다. 그럼 예수님의 거룩한 삶에는 웃음과 즐거움의 여지가 없었을까?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셨다. 우리들이 일반적인 거룩의 개념으로 보면 잔칫집에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겨우 3년 반 정도의 짧은 생애를 살면서 복음을 전해야 했기 때문에 잔칫집에 가서 마시고 웃을 시간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잔칫집에 가셨다. 예수님은 잔칫집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점잔을 빼며 입을 다물고 묵묵히 앉아 계시지 않았다. 잔치는 즐거운 모임이다. 서로 기뻐하고 춤을 추는 곳이다. 결혼 잔치에서는 재미 있는 농담도 주고 받으며 실컷 웃는다. 예수님도 하객들과 함께 춤도 추고 신랑과 신부를 축하하며 웃고 즐거워하셨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포도주의 기적은 예수님의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드러내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그런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뒷짐지고 점잖은 척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포도주도 드셨을 것이다. 자신이 만든 포도주를 거룩한 체면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안 드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혼 잔치에서는 하객들이 신랑과 신부를 위해 축배를 들지 않는가? 사실상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눅 7:34)이라는 비난을 받으실 정도였다.

 

예수님은 가장 거룩하고 가장 매력 있는 인간이었다. 어린 아이들도 그를 따랐고 어른들도 그와 함께 있기를 좋아하였다. 예수님은 지루하거나 메마른 분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두려워서 감히 가까이 갈 수 없는 분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이 언제나 쉽고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세상이 온통 죄악으로 덮였다고 해서 인간들의 자연스런 삶의 모든 구석들을 정죄하며 멀리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 세상 깊숙이 들어오셨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셨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기적으로 만드시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의 성품을 그대로 반영하신 분이다. 거룩하신 아버지는 우리들이 가장 자연스런 모습으로 기쁨을 표현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 자신도 그렇게 하시기 때문이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습 3:17공동번역).

표준새번역에는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 고 하였다.

 

우리 주님은 기뻐서 노래도 하시고 춤도 추신다! 얼마나 인간다운 모습인가? 거룩의 한 측면은 가장 인간다운 것이다. 억지나 위선이나 감춤이 없이 솔직하고 투명하게 기뻐할 줄 알고 웃을 줄 알아야 한다. 기쁨은 구원의 한 속성이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다(사 40:9, 표준새번역). 좋은 것을 놓고 기뻐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신자들의 삶에는 웃음이 있어야 한다. 신자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곳마다 기쁨의 깃발이 흔들려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교회와 가정에 왕으로 와 계신다. 우리들의 왕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복된 소식을 전하신다. 주님을 따라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아 갔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기쁨의 포도주를 마시며 즐거워하였다. 주님을 따르는 일에는 고난도 온다. 그러나 슬픔 많고 죄가 많은 이 세상에서 신자들은 웃고 살아야 할 충분 타당한 이유가 있다. 주께서 생명의 포도주를 만드시고 마시게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주님의 혼인 잔치에 초대된 자들이다. 주님은 고난의 삶 속에서도 지루하거나 어둡게 사시지 않았다. 우리는 지루하고 답답한 예배를 드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들은 가정에서 우울하게 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과의 교제에서 날마다 죽는 소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은 신자들이 살기에 결코 쉬운 곳이 아니다. 그러나 기쁨의 주께서 우리들과 함께 사신다. 그렇다면 기쁨의 깃발을 우리 인생의 지붕 위에 높이 매달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포도주를 넘치게 마시며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기쁨을 죽이시는 분이 아니고 구원의 기쁨을 뿌리시는 뿐이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우울하게 예수님을 믿지 말라. 지루하게 예수님을 따라다니지 말라. 마지 못해 신앙 생활을 하지 말라.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우리들이 주님을 따른다면 주님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 우리들의 주님은 기쁨의 주님이시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도 거룩한 삶의 일부분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의 새 포도주를 마시고 기뻐하는 가나의 혼인 잔치는 하나님 나라의 정상적인 무드를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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