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 강해(14) 

골방의 문을 닫으라

열왕기하 4:1-7

엘리사는 그를 찾아온 과부에게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4:3)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모든’ 이라는 말을 주목하십시오. 4절에서도 “그 모든 그릇”이라고 했을 때의 ‘모든’을 주목하십시오. 6절을 보면 ‘그릇에 다 찬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이웃들에게서 빌린 ‘모든’ 그릇이 기름으로 ‘다 찼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넘치는 후한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은 ‘모든’ 필요를 채울 때까지 내립니다. 모든 이웃에게서 빌려온 모든 그릇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채워졌다는 것이 본문의 강조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녀가 그릇들을 더 빌렸더라면 더 채워졌을 터인데 유감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온 세상으로 다니면서 그릇이라는 그릇은 다 빌려야 했단 말입니까?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갑부가 되고 억만장자가 되겠다는 것입니까? 그 과부는 그럼 대박이 터지는 기회를 놓친 것일까요? 로또 심리의 대박 주의는 자아 확대증 환자들의 특징입니다. 주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작은 일에 신실하면 큰일을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대박을 터뜨리고 작은 일에 충성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대박이 터지면 작은 일에 충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충성하지 못하면 교만하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자기 마음을 따라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도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오래전부터 교회에 침투해서 지금까지 판을 치는 세속적 사고방식인 ‘적극적 사고’니 ‘긍정의 힘’이니 하는 관점에서 보면 이 시편 기자는 매우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큰일은 고사하고 작은 일에도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누가 하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까? 사람이 주장하는 말입니까? 시편 저자처럼 마음이 교만하지 않고 눈이 오만하지 않은 것이 실패일까요? 하나님께서 맡기지도 않은 큰일을 탐하지 않고 기겁을 할 정도로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않는 것이 부정적인 사고방식일까요? ‘긍정의 힘’으로 누구를 놀라게 해 주려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놀라게 해 주려고 하는 것입니까? 자신의 경쟁자들을 놀라게 해 주려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그 과부가 믿음이 부족했다고 말합니다. 엘리사가 많이 빌리라고 했는데 그 여자는 조금만 빌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원은 무한대이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채웠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큰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위험한 믿음입니다. 침 믿음이 아니고 자기 욕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은 나의 믿음을 과시하거나 내가 원하는 만큼 끝없이 받아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은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과 사랑이 증명된 후에는 그치게 되어 있습니다. 6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빌려온 모든 그릇에 기름이 다 찼다고 하였습니다. 더 채울 그릇이 없었을 때 기름의 흐름이 그쳤더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과부가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했을 때 아들들이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라고 한 것은 다른 그릇이 있었더라면 더 채워졌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고, 과부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 하심이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하게 증시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말씀의 강조점은 그릇을 더 빌렸어야 했다가 아니고, 빌린 그릇들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모두 다 채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름이 더 나오지 않고 그친 것은 과부의 가난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도우심이 이제 부족함이 없이 소기의 목적을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깨달은 그 과부의 가족들은 누구도 불평하거나 아쉬워하거나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과부는 아이들에게 속히 나가서 그릇을 더 빌려 오라고 했을 것입니다. 엘리사도 그 과부에게 왜 그릇을 더 빌리지 않았느냐고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도 만족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면 다 끝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언제까지 기름을 부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엘리사가 과부에게 어떻게 말했는지 주목하십시오.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두 아들과 함께 생활하라고 하였습니다. 빚을 갚을 정도로 기름을 채우고 자식들이랑 먹고살 정도로 기름이 남았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원래 과부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의 자원이 무한대라고 해서 내 욕심의 분량대로 다 받아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기름통이 언제까지 더 채워져야 하겠습니까? 내가 온 사방에서 끌어모은 온갖 종류의 기름통들이 다 채워져야 속이 후련할까요? 내 집의 기름통이 날마다 철철 넘쳐야 하겠습니까? 우리 교회의 기름통이 끝없이 늘어나야만 하겠습니까? 그래서 너도나도 대형교회가 되고 그것도 부족해서 온 세상에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초대형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 선교는 한국 교회가 도맡아서 해야 한다고 야단이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요즘은 그런 구호를 잘 들을 수 없습니다. 아마 선교를 해 보니까 그것이 혼자 도급을 받듯이 도맡아서 할 일이 못 된다는 것을 뒤늦게라도 깨달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기름통에 욕심을 내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릇을 빌리라고 하시면 부지런히 빌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행하라고 지시하는 말씀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엘리사는 그 과부에게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4절)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릇을 빌리는 때가 있고 그릇을 채우는 때가 있습니다. 빌리기만 하면 채울 시간이 없습니다. 수 없이 빌린 그릇들이 채워지지 않은 상태로 방치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은 잔뜩 모았는데 기름을 채울 시간이 없지는 않습니까? 빈 그릇인 것은 교회에 오기 전이나 온 후나 별 차이가 없지는 않은지요? 채워주지 못할 그릇들이라면 아니 빌려온 만 못하지 않을까요? 오늘날 우리 교회의 한 문제는 채워지지 않은 그릇들이 즐비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지 못하고, 복음의 사상으로 채워지지 못하며, 성령의 기름으로 채워지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지 못한 교인들이 극빈자의 빈 그릇처럼 여기저기 널려 있다면 그러한 영적 가난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4:4)

엘리사는 왜 ‘문을 닫고’ 이 일을 행하라고 했을까요? 만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 일을 행했을 경우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녀는 선지자의 부름을 받은 자도 아니었고 평범한 한 가정의 과부였습니다. 그녀가 소량의 기름 한 병을 다른 많은 빈 그릇들에 부을 때마다 가득 차게 되는 것을 사람들이 보았다면 어떤 반응이 나왔겠습니까?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든 그릇을 가져와서 기름으로 채워 달라고 졸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부는 즉각 하나님께서 흔히 말하는 표현대로 ‘귀히’ 쓰시는 기적사로 떠받쳐졌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기름을 찾으러 몰려 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무리가 어떻게 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기적은 그 용도와 물량에 ‘제한’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과부를 갑부로 만들기 위해서 기적이 일어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기름을 팔고 빚을 갚은 후에 남은 기름으로 두 아들과 어느 정도 살게 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남은 기름도 언젠가는 다 소진되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그녀는 다른 살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녀는 다시 기름을 빈 그릇에 부어서 채우는 기적을 행하라는 지시를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녀가 이 일을 처음 행할 때 문을 닫으라고 하셨습니다. 자랑거리도 아니고 광고거리도 아니며 기적사로 나서는 일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신령한 체험입니다. 여러 무리와 나눌 수 있는 하나님의 공적인 기적도 있고 조용히 개인적으로 경건하게 문을 닫고 체험해야 하는 기적도 있습니다. 과부의 기적은 일회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두 아들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닫힌 방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숨이 멎을 듯한 벅찬 감동으로 체험하였습니다. 그녀는 가난에 쪼들린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동정하시고 두 아들을 빼앗기지 않게 하시는 자비하신 사랑의 하나님을 자신의 골방에서 만났습니다. 그녀에게는 단 한 번의 기적으로 충분하였습니다. 그녀는 앞으로 항상 하나님의 신비한 기적만을 의존하는 삶이 아니고 정상적인 삶으로 생계를 유지해 나가야 했습니다.

아마 그 과부는 기름 기적을 다시 행해 보라는 부탁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때의 비법을 공개해 달라는 요청도 받았을 것입니다. 왜 대형 집회를 열고 기적을 계속해서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지 않으냐는 도전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 비법의 능력이 있다고 과시하면서 하나님의 큰 종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은 지금도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그런 기적사들이 주도하는 집회에는 열렬한 박수가 터지며 돈 자루가 터집니다. 주최 측도 참석자도 대박을 터뜨리려고 빼곡히 들어찹니다. 그들은 날마다 그렇게 삽니다. 그들은 기적을 팔아서 삽니다. 그들은 기적을 먹고 마시면서 삽니다. 그들은 날마다 기적을 보아야 하고, 기적의 소문을 들어야 하며, 기적의 냄새를 맡아야 합니다. 그들은 기적 중독증에 걸린 자들입니다. 본 스토리의 과부도 원한다면 아마 그렇게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대박을 터뜨리는 행운의 기회를 놓친 것일까요?

성경은 그 과부의 나머지 삶에 대해서 침묵합니다. 우리는 그 엄청난 기적을 행했던 과부의 이름조차 모릅니다. 그녀는 분명 평범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에는 닫혔던 문 안에서 있었던 경이로운 체험들이 고이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그녀는 조용히 빈 그릇을 기름으로 채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는 빈 그릇이 채워지는 기적을 보며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과 사랑을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가난이 몰고 왔던 삶의 아픔이 기름처럼 흘러나갔습니다. 두 아들을 잃어야 하는 기막힌 두려움도 기름처럼 흘러나갔습니다. 그녀는 과부의 연약함과 슬픔을 이해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기름을 부었습니다. 빈 그릇이 다 채워질 때까지 그녀는 여호와 하나님의 끝없는 공급과 돌보심의 사랑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이것이 그녀의 영적 삶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기적의 능력은 기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의 능력은 은혜를 받은 자가 하나님을 전혀 새롭게 체험하는 것입니다. 기적의 능력은 기적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의 참 능력은 기적을 체험한 자가 하나님 앞에서 깊은 고개를 숙이고 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적 겸비에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과부의 기름 붓기의 기적은 그녀로 하여금 영적으로 가장 풍요한 것을 깨닫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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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위클리 07.1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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