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 강해 (11)

실족을 통한 교훈

열왕기하 3:1-13

“여호사밧이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있도다 하는지라 이에 이스라엘 왕과 여호사밧과 에돔 왕이 그에게로 내려가니라”(왕하 3:12). 

이스라엘 왕인 여호람은 아합 왕이 죽고 이스라엘의 국력이 줄어든 틈을 타서 모압 왕이 매년 바치던 공물을 중단하고 배반하자 모압을 침공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는 승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남부 유다의 여호사밧에게 사신을 보내 전쟁 참여 의사를 물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즉석에서 쾌히 승락하였습니다. 이들은 에돔 왕까지 합세하게 하여 세 나라의 연합군으로 모압을 치려고 계획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막 길로 들어섰다가 일주일 후에 식수가 떨어져 모압의 역공을 당할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본문은 이들이 엘리사를 찾아가서 자신들이 처한 난경을 호소하는 스토리입니다.

  1. 여호람이 주는 교훈

여호람은 겉치레의 개혁으로 만족하였습니다. 여호람은 아합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부친에 비하면 나은 편이었습니다. 그는 부친이 세웠던 바알 주상을 파괴하였습니다(3:2). 그러나 그는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 죄를 떠나지 않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3:2, 3)하였습니다. 여호람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치 못하였습니다. 그는 한 가지 죄는 청산했지만 또 다른 죄는 붙잡았습니다. 그는 엘리야 선지자의 과격한 종교 개혁이 단행된 이후의 분위기를 고려하였습니다. 그래서 아합과 이세벨의 노골적인 바알 경배를 지지하지 않는 것이 상황적으로 유리하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여로보암의 금송아지 숭배는 자신의 정치적 안전과 백성들의 종교 활동에 도움이 될 것으로 간주했을 것입니다. 그는 필요에 따라 편한 대로 행하는 자였습니다. 사실상 그는 성소에 있는 바알의 주상을 제거했을지라도 바알 종교 자체를 나라에서 완전히 몰아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편의상 강조점을 바알 경배에서 금송아지 경배 쪽으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사 선지자는 나중에 여호람이 그에게 도움을 받으러 왔을 때 그의 부당한 처신을 지적하며 부모들이 따랐던 우상 선지자들에게 가라고 했습니다(13절).

[적용]

여호람의 후손들은 지금도 많습니다. 어떤 죄를 버리는 것은 불리한 압력을 받지 않기 위해서 혹은 보다 나은 것을 얻기 위한 일시적인 중단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마음의 개혁에서라기 보다는 자신의 신분 노출의 염려나 체면 유지나 막연한 불안감에서 오는 현상일 수 있습니다. 금송아지 우상과 바알의 주상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일종의 처세에 불과합니다. 여호와께 돌아오려면 금송아지도 바알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여호람의 경우, 그가 바알의 주상을 제거한 것은 경건한 유다의 여호사밧 왕에게 정치적 협조가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됐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죄를 정리한 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 자체가 싫고 나쁘기 때문에 절단하는 것과 전략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양보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죄는 죄이기 때문에 버려야 합니다. 이해 관계 때문에 죄를 버린다면 상황이 바뀔 때에 다시 붙잡게 됩니다.

  1. 엘리사가 주는 교훈

엘리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영적 품위를 지켰습니다. 뜻밖에도 세 명의 왕들이 엘리사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왕관을 쓴 세 나라의 왕들로서 엘리사의 도움을 구하려고 찾아 왔습니다. 엘리사는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그는 한 농촌에서 소를 몰며 밭을 갈던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평범한 농민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엘리야 선지자의 뒤를 이은 후임 선지자였지만 그의 신분은 여전히 이스라엘 국가의 한 시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들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그들의 내방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아첨의 말을 하지도 않았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 나중에 이용할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들 앞에서 당당하였고 그들의 세상 영예와 권력에 조금도 현혹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는 세상 왕과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늘 왕관을 쓰신 만왕의 왕되신 하나님과 늘 교제하며 그분 앞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세상의 헛된 영화나 권력 앞에서 비굴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살면 그분의 위대하심을 날마다 새롭게 확인합니다.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세상 영화는 관심에서 사라지고 주님의 영광만 바라게 됩니다. 엘리사는 세상 영화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들 앞에서 자신의 영적 품위를 지켰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권위 있게 전하였습니다.

[여호람 왕에 대한 엘리사의 견책]

엘리사는 여호람 왕을 좋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여호람은 세속적인 삶을 살다가 다급할 때에만 최후의 궁여지책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였습니다. 그런 여호람에게 엘리사는 면박을 주었습니다. 자기 부모인 아합과 이세벨에게 속한 바알 선지자들에게로 가지 왜 자기에게 왔느냐고 꼬집었습니다(13절).

이런 식의 면박은 필요한 것일까요? 엘리사는 너무 무례하지 않았는지요? 그가 좀 더 부드럽게 좋은 말로 이스라엘 왕을 대했더라면 다른 두 왕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주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이 문제는 목적과 동기와 효과의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목적: 여호람으로 하여금 우상 종교의 무익성과 무력성을 뼈아프게 느껴서 우상들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이키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동기: 악심에서 내뱉는 언어적인 보복이 아니었습니다. 여호람은 그의 부모들의 바알 숭배로 이스라엘 국가가 너무도 심각한 배도에 빠진 것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우상 종교에 의지하기 때문에 그의 어리석음을 각성시키려고 하였습니다.

효과:  따끔한 지적이 잘못을 깨닫게 하는데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얼굴이 지저분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얼굴에 큰 흠이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까? 거울입니다.  엘리사는 여호람이 자신의 심각한 결함을 보게 하기 위해서 말씀의 거울을 그의 얼굴 앞에 바짝 디민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얼굴이 붉혀져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받은 메시지의 칼라나 어투나 내용을 세상의 신분이 높다고 해서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희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람이 들어야 할 말을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할 때에도 동일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돈이 있고 직업이 좋다고 알아주는 것은 세속적인 처세관입니다. 그런 가치관을 따르면 교회는 세상적으로 잘난 사람들만 직책을 받고 운영해 나간다는 말이 됩니다. 돈이 있건 없건, 세상이 알아주는 직업을 가졌든지 못 가졌든지 외국 학위가 있든지 없든지 교회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 복종해야 합니다.  엘리사는 이런 자세로 사역을 했기 때문에 나중에 나아만 장군을 우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많은 예물을 가지고 엘리사를 찾아왔는데도 급히 나가서 굽실거리지도 않았고 특별 대우를 한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사실상 문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나아만에게 그가 행할 일만 지시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여호람에게 또 한 가지 지적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만일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봄이 아니면 그 앞에서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라’(왕하 3:14).

여호람은 우상 종교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급하게 되자 여호와를 이용하려고 했지 여호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여호람은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궁색하다 보니 엘리사의 노골적인 반감에도 부드럽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나이다”(13절)라고 호소하였습니다. 물론 엘리사가 그에게 우상 선지자들을 찾아가라고 한 말은 기분 좋게 들리지 않았겠지만 여호사밧 왕을 전쟁에 참여시킨 것은 그가 사는 길이 되었음을 깨닫고 다행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 예수를 사랑하는 자들 때문에 자신들이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에 의인 십 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창 18:32).

  1. 여호사밧의 교훈

여호사밧은 불의한 이웃과 친선 관계를 맺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유대 나라의 좋은 왕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여호와 종교로 나라를 이끌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성급하게 우상 숭배자인 여호람과 군사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대(對) 이스라엘 정책이 선왕들처럼 방어적이었으나 점차 국경 수비를 풀고 친선 관계로 바꾸었습니다. 그는 오므리 왕가와의 정략 결혼으로 국가 안보를 시도하였습니다(왕상 22:44). 그는 자기 아들을 아합과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와 결혼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이 결혼의 결과로 아달랴가 유다에서 세력을 잡고 다윗 왕가의 씨를 말리려고 시도하였습니다(왕하 11:1-3).

여호사밧은 과거에도 이스라엘과 여러 번 바람직하지 못한 관계를 가졌던 전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합과 함께 아람을 공격할 때에 하나님의 견책을 받았고 그 때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대하 18:31, 32; 19:1, 2). 또한 그는 아합의 악한 아들인 아하시야와 함께 해양 산업에 손을 대었다가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았습니다. 그 때 다시스로 항해하려고 지은 배들이 모두 부서지고 말았습니다(대하 20:35-37). 이런 과거의 전철이 있었음에도 그는 아합의 아들이며 아하시야의 동생인 여호람이 원하는 동맹군 요청에 선뜻 나섰습니다.

[교훈]

사람마다 약점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여호사밧은 경건한 왕이었지만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약점은 북이스라엘에게 불필요한 호의를 베풀며 선심을 쓴 것이었습니다. 그는 부패한 북이스라엘과의 친선 유지에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람이 모압을 치자고 하자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승락해 버렸습니다. 그는 어쩌면 여호람이 바알의 주상을 제거한 것을 보고 여호와께로 돌아왔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모압을 이번에 완전히 꺾는 것이 유다의 안보를 위해서도 유익이라고 판단했을 듯합니다. 그러나 신앙 원칙을 제쳐 놓고 우상 숭배자와 손을 잡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여호사밧은 메마른 광야에 들어가서 식수난으로 생명의 위협에 직면하고서야 자신의 우매를 깨닫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들의 장자권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나의 약점은 항상 사탄의 공격 대상입니다. 성공률이 가장 높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금방 쏠리는 일일수록 하나님께 먼저 물어보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여호사밧이 저질은 또 하나의 실수가 있습니다. 여호람은 여호사밧에게 전략 루트를 결정하라고 맡겼습니다. 아마 그를 윗사람으로 대우한다는 호의적인 제스츄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북쪽에서 공격하는 정상적인 루트를 피하고 사해 바다 남쪽으로 둘러서 가기로 하였습니다. 남쪽에서 모압을 습격하면 예상하지 못한 방향이기에 유리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또한 가는 길에 에돔까지 합세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계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사막지대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날 동안 행군하다가 물이 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여호사밧은 자신의 전략에 흠이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전쟁의 성패는 흔히 그렇듯이 생각지 못한 상황에 의해 결정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전쟁사는 ‘전쟁은 여호와께 속하였다’ 는 결론을 내립니다(삼상 17:47; 대하 20:15). 여호사밧은 그의 전략에 하나님을 고문으로 모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막에서 물이 떨어졌을 경우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실수할 때에 보이는 반응]

여호사밧은 유다의 경건한 왕으로서 여호와 경배를 백성들에게 강조하고 아세라 목상들을 제거하며 공정한 법을 집행하게 하였습니다(대하 19장).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도 때로는 실수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의 다른 점은 실족하여 곤궁에 빠질 때에 겸비한 자세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반면, 불경한 자들은 어려움이 오면 자신들의 실수와 잘못으로 생긴 일임에도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여호람은 식수가 떨어지자 당장 하는 말이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10절)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세상은 항상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인간의 욕심과 죄악과 타락으로 인해 발생하는 온갖 불행을 모두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며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전쟁, 기아, 질병, 경제 파탄, 각종 사고 등등이 다 하나님의 잘못이거나 하나님이 막아주시지 않아서 일어난다고 봅니다. 여호람은 자신의 실책의 결과로 죽음의 문턱에 이른 것을 알고 나서야 ‘여호와’의 이름을 언급하며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는 죄책감과 공포심으로 질려 있었습니다.

여호람의 불평을 들은 여호사밧은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11절) 고 당장 물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평소에 잘 섬기다가도 여호람과 같은 상대할 수 없는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유로 얽히게 되면 그만 실족하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럴 때에 자기답지 않은 실수와 죄로 인해서 낙담하며 자신에 대한 회의에 빠질 것이 아니라 여호사밧처럼 하나님을 속히 찾아야 합니다. 여호사밧은 자신의 어리석음이 지적될까 봐 엘리사 선지자를 기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엘리사가 근처에 있다는 말을 듣고 주의 말씀이 그와 함께 있으니 만나러 가자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실족하여 발을 절고 죄에 넘어져 피곤할지라도 일어나서 주께로 가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주님의 치유를 받게 됩니다(히 12:12-13). 여호사밧은 엘리사를 만났지만 왜 그런 무모한 모험을 하고 어리석은 결정을 하였느냐는 견책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평소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자녀들의 실수에 너그러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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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위클리 2015.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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