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 강해(10)

하나님은 아이들도 죽이실까요?

열왕기하 2:23-25

 

성경에는 가끔 현대 사회의 기준에서 보면 우리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스토리가 나옵니다. 예를 들어 가나안 정복 때에 어린 아이들까지 몰살시킨 일이라든지 혹은 동성 연애자들을 돌로 쳐서 죽이는 형벌 등입니다. 물론 이런 사례들은 당시의 배경과 문맥에서 보면 훨씬 더 나은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표면상으로 보면 본문의 경우처럼 당황스럽고 회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맹렬한 불의 선지자라면 엘리사는 은혜로운 단비의 선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 사건은 엘리사의 이미지를 바꾸어 놓는 뜻밖의 에피소드입니다. 더구나 그의 초기 사역에서 발생된 사건이기에 더욱 주목하게 됩니다.

엘리사는 여리고에서의 성공적인 사역을 마치고 벧엘로 향하였습니다. 그가 여리고에서 오염된 물을 정화시킨 사건은 벧엘에 이미 소문이 났을 것입니다. 성읍 전체의 생존과 경제가 살아나는 이 기적은 엘리사의 사역에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벧엘 주민들에게도 엘리사의 내방(來訪)은 좋은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양 손으로 엘리사를 환영한 것이 아니고 거친 영접을 하였습니다.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23절).

엘리사는 이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를 하였습니다. 그 때 즉시 두 마리의 곰이 숲에서 나와서 아이들을 다 찢어 죽였습니다. 이 끔찍한 사건은 엘리사가 사랑과 은혜의 선지자가 아니고 저주와 죽음의 선지자라는 무서운 인상을 심어 줍니다. 본문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가 너무 심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조롱과 모욕을 받았기로서니 그렇게 인명들을 무자비하게 죽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엘리사가 ‘작은 아이들’을 저주했기 때문에 야수가 나와서 물어 죽게 했다면 그런 선지자와 그의 저주를 그런 식으로 응답하신 하나님을 어찌 혐오하지 않겠는가?』

  1. ‘작은 아이들’은 누구인가?

‘아이들’은 ‘청소년’(youths=NIV)으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이 단어는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갔던 이삭을 비롯하여 17세가 되었던 요셉과, 20세를 넘었던 솔로몬과, 선지자의 부름을 받았을 때의 예레미야를 가리킬 때에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이들의 나이가 정확하게 몇 살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청소년’으로 번역하는 것은 엘리사의 저주가 철 없는 아이들에 대한 과잉 반응이 아니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시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임을 당한 아이들은 적어도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에 이르렀다는 인상을 주려는 것입니다.  이들은 꾀 큰 아이들일 수도 있고 혹은 청소년들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게 엘리사가 저주를 한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엘리사가 그런 사람이었다고 보면 그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하나님께서 철 없는 아이들을 죽이기 위해서 곰을 보내셨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 사건은 훨씬 더 큰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 아이들의 놀림은 의도적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엘리사 선지자를 조롱한 행위는 여럿이 모였을 때 한 두 아이가 시작한 짓궂은 짓을 너도 나도 따라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엘리사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었습니다. 왜 아이들이 엘리사에게 의도적인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을까요? 이 문제는 벧엘의 상황을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벧엘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예루살렘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언급된 성읍의 하나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건 이후로 ‘하나님의 집’으로 알려졌습니다(창 28:19). 그러나 벧엘은 솔로몬 이후에 북부 이스라엘의 우상 종교의 중심지가 되어 여호와 종교와 그 선지자들을 대적해왔습니다.  벧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니고 ‘우상의 집’이 되었습니다. 벧엘의 우상 숭배자들은 엘리사가 엘리야의 사역을 이어받아 여리고에서 기적을 행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엘리사가 여리고 주민들의 인기와 지원을 받고 벧엘로 들어오자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엘리사의 방문을 환영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사가 벧엘로 들어와서 영향을 끼치기 전에 타운의 입구에서부터 불량배 아이들(혹은 청소년들)을 시켜 모욕을 하게 하였습니다. 수 십 명의 아이들이 따라오면서 길을 막고 조롱을 하는 것은 모멸감을 줄 뿐만 아니라 언제라도 폭행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둘째, 아이들의 놀림은 영적 싸움의 증거였습니다.

아이들은 엘리사를 보고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조롱하였는데 이것은 단순히 엘리사의 외모에 대한 모욕 이상의 행위였습니다. 벧엘의 우상 숭배자들은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분명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엘리야의 승천을 믿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엘리사를 도전하여 엘리야처럼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보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엘리사에 대한 도전은 그의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벧엘에는 사탄의 보좌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소명을 이어받은 엘리사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옹호해야 했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참 선지자를 모독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를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엘리사의 저주는 개인적인 악감이나 보복의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엘리사가 단순한 장난끼의 조롱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으로 저주를 했다면 결코 곰들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곰들은 엘리사가 보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사에 대한 조롱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예와 거룩한 이름에 대한 무엄한 도전으로 보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친히 선지자로 세우시고 능력을 입혀 준 엘리사의 권위도 강력하게 드러내는 심판을 집행하셔야 했습니다(시 105:15).

  1. 어둠의 세력은 항상 빛의 세력을 공격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뱀의 모습을 한 사탄은 인류의 조상을 유혹하여 넘어뜨렸습니다. 그 이후로 사탄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는 끊임 없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탄은 인류를 계속해서 유혹하며 빛의 자손들인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자기에게 속한 불신 세력들을 통해 공격합니다. 벧엘에서의 사건도 이러한 빛과 어둠 사이의 쟁투를 예시합니다. 기나긴 구속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어둠의 세력들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상기해 보십시오.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하였고 악한 세력들이 사탄의 조종을 받으며 예수님을 조롱하고 멸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고향인 나사렛에서 배척을 당하셨는데 주민들이 예수님의 메시지를 듣고 격분하여 그를 벼랑으로 끌고 가서 밀쳐버리려고 했습니다(눅 4:28-30).

하나님께서는 악을 심판하십니다. 벧엘에서처럼 나사렛에서도 심판이 내렸습니다. 벧엘에서는 엘리사를 조롱하며 하나님을 배척했던 자들이 곰들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복음은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되고 다른 이들에게는 죽음의 냄새가 됩니다(고후 2:16).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로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 있습니다. 이 심판은 엘리사 시대에도 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은혜의 복음에는 심판의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낭만적 메시지가 아닙니다. 복음은 진리의 빛을 비쳐주고 어둠에서 해방되는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배척하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비웃는 자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엘리사의 저주로 내린 벧엘에서의 심판은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선포하는 선지자들을 조롱하는 악행에 대한 엄숙한 경고였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양손을 펼치시며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거저 주는 은혜의 구원을 받으라고 호소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동정과 부드러움으로 가득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그러나 모든 악인들을 지옥불에 던지시는 진노의 어린 양도 되십니다.  복음의 메시지에는 언제나 심판의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여리고 주민들은 식수가 오염되고 생존의 위협을 느끼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돌렸습니다. 그들은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와서 도움을 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의 능력으로 정화된 생수를 마시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벧엘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들은 구원과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그들을 방문한 엘리사 선지자를 조롱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성읍에 죽음의 곡성이 울렸습니다. 여리고에서는 축복으로 나왔던 말씀이, 벧엘에서는 저주가 되어 나왔습니다.  전자는 생명과 번영을 가져왔고, 후자는 죽음과 재앙을 불러 왔습니다.

여리고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입을 통하여 여러 해 전에 저주를 하셨던 곳이었습니다. 벧엘은 하나님께서 오랜 옛날에 야곱을 만나시고 축복하셨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양 쪽의 상황이 번복되었습니다. 여리고는 복을 받고 벧엘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장소나 시대에 묶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자동적으로 넘어가지도 않습니다. 저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리고 성의 저주는 벗겨질 수 없는 불변의 재앙이 아니었습니다. 축복도 저주도 바뀔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직면했을 때 우리들이 어떤 결정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벧엘의 아이들은 노래를 하듯이 엘리사를 보고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따라다니면서 조롱하였습니다. 아이들의 이러한 사악한 행위는 벧엘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졌는지를 표출한 것입니다. 아이들 뒤에는 우상을 숭배하고 여호와와 그의 선지자들을 멸시하는 벧엘의 불경한 부모들이 있었습니다.

[풍성한 은혜와 풍성한 심판]

벧엘 에피소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는 자들에게 심판이 내린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전시하였습니다. 충격이 없으면 심판의 심각성을 모릅니다. 예수님도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상징하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전 파괴를 예고하셨으며 AD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성전과 예루살렘이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충격으로 임합니다. 그래야 정신을 차리고 깨어날 자들이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씻기고 삶을 갱신시킬 은혜의 사역을 거부하면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경고합니다. 그것은 넘치게 주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어느 날 넘치는 정죄와 심판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그들을 영접하는 자는 주님 자신을 영접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마 10:40;). 그러나 그들의 복음을 듣지 않는 자들에게는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큰 심판이 기다린다고 경고하셨습니다(마 10:14-15). 바울도 복음 전파의 효과를 이런 관점에서 언급하였습니다(고후 2:16).

나는 은혜의 복음을 들려주려고 나의 삶 속으로 들어오려는 엘리사를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엘리사의 접근을 막기 위해 무례한 아이들에게 조롱의 노래를 가르쳐 보내지는 않습니까? 내가 사는 곳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에게 가서 생명수를 마시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여리고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축복을 걷어 차고 재앙을 자초하는 벧엘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벧엘’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집’이라면 ‘헛된 것’(벧아웬)으로 채워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복음의 진리를 대항하는 모든 것들을 다 찢어 버리기를 원하십니다. 내 속에는 무서운 곰들의 공격을 받아 찢겨져야 할 부분이 없습니까?

엘리사를 심히 조롱했던 사십이 명의 아이들은 곰에 찢겨 아까운 목숨을 잃었습니다. 어떻게 곰 두 마리가 그렇게 많은 아이들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곰이 먼저 한 두명을 공격하는 동안이라도 다른 아이들은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리고의 독물을 소량의 소금으로 정수시킨 하나님께서는 소수의 곰들로 많은 사람들을 단 번에 죽일 수 있습니다. 은혜에 풍성하신 하나님은 심판에도 풍성하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다행히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복음을 배척하는 무엄한 죄인들에게 곰들을 자주 보내시지 않습니다.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도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에 풍성하십니다. 그러나 은혜에 더욱 풍성하셔서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며 구원의 말씀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하지만 조만간 모든 은혜의 문이 닫힐 때가 옵니다. 어떤 이에게는 죽음으로 더 이상 복음을 들을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이에게는 오랜 불신으로 마음이 굳게 닫혀서 복음에 응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되찾기 위해 벧엘의 악한들에 맞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심판을 경고하고 교회의 그릇되고 안일한 말씀 강해를 갱신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충분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을 향한 것만이 아닙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심판은 그의 자녀들에게 먼저 내린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벧전 4:17-18).

벧엘에서의 두 마리의 야생 곰들은 자신들의 소명을 철저하게 완수하였습니다. 이러한 경고로 충분해야 합니다. 더 이상의 곰들이 나와서 우리를 찢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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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리아 위클리(15.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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