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 강해 (4)

누가 불말과 불수레를 보는가?

열왕기하 2:8-14

“이르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왕하 2:10).

엘리사는 무엇을 구하는 엘리사의 말을 듣고 엘리사에게 내린 성령의 역사가 갑절로 임하기를 원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자신의 소원을 알린 후에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금방 그의 요청이 응답되었습니까? 엘리야는 이상하게도 엘리사에게 원하는 것을 구하라고 해놓고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10절)라는 엉뚱한 대꾸를 하였습니다. 줄 테니까 부탁하라고 해놓고 나서 이렇게 말하면 발뺌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는 다시 엘리야의 숨은 뜻을 엿보게 됩니다. 그는 과연 대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역과 생을 마감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믿음과 신실로 충일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목첩에 둔 시점에서까지 후진을 위해 봉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노련한 엘리야는 엘리사의 손에 원하는 것을 금방 쥐어 주지 않았습니다.

엘리사에게는 마지막 시험이 남아 있었습니다.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라는 말은 엘리사의 끈기와 믿음을 다시 한 번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앞에서 ‘너는 여기 머물라’고 한 말과 동일한 시험의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떼어놓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그를 대동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테스트를 통해서 자신의 충성과 신실을 증명해야 하였기에 그가 엘리야를 따라 가는 곳마다 ‘너는 여기 머물라’는 지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엘리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전적인 헌신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엘리사가 맹세로 그와의 동행을 결심할 때마다 막지 않고 따라오게 하였습니다.

본문은 이 사실을 적시함으로써 엘리야의 의도가 엘리사를 떼어 놓으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시사합니다(참조. 2, 6, 7, 11절). 이처럼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라고 한 것은 원하는 것을 주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어렵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하다고 잘라서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말은 마지막 순간까지 철저한 테스트를 받고 하나님의 큰 약속이 실현되는 승리를 체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10절).

엘리야는 높은 차원의 영적 수준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엘리사의 헌신이 최대치에 이를 때까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는 엄숙한 꼬리표를 붙였습니다. ‘네가 보면’은 엘리사의 청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최후의 테스트로서 엘리사에게 내건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이 경고는 엘리사에게 최후까지 신실하게 오직 하나님의 일에 몸과 마음과 정신을 집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일이라고 해서 포기하거나 혹은 다른 쉬운 것을 구하지 말고 최선의 것을 놓고 부단한 신뢰로 하나님을 끝까지 기다리라는 뜻이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어떤 의미에서 성령의 능력을 달라고 청하는 자들에게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구하는 것을 주는 일이 어렵다는 뜻이 아니고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크고 중한 것을 구할 때에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라 하여도 즉석에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순절의 제자들도 기도하자 마자 성령의 부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거쳐야 할 충성과 신실이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매우 후하시기 때문에 자녀들의 필요를 넉넉히 공급해 주기를 기뻐하십니다. 반면에 자녀들이 하나님께 충성을 보이기를 기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달라고 청하는 것은 성령으로 일어난 주님의 부활과 새 생명의 능력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져오는 영광을 원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도전하셨습니다(막 10:37-40).

엘리야는 한 가지 엘리사에 대해서 확신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약 10년 전에 성령의 지시에 따라 엘리사에게 자기의 겉옷을 던졌던 사실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엘리사를 부르셨기에 엘리사에게  필요한 능력을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자신의 임종 직전까지 엘리사에게 내리실 성령의 능력을 기다리게 하실지 몰랐습니다. 만약 엘리사가 전적으로 신실하다는 것이 증명되면 하나님은 분명 그의 필요를 채우실 것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이 같은 믿음으로 엘리사에게 자신이 데려감을 당하는 것을 보면 원하는 것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이 약속 후에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11절)라고 한 것은 엘리사가 여전히 계속해서 엘리야를 떠나지 않고 있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들은 길갈에서부터 시작하여 벧엘로 갔었고 다시 여리고로 갔습니다. 그리고 요단까지 동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요단 강을 건넌 후에도 계속하여 함께 걸으며 교제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엘리사는 엘리야의 말대로 그의 승천을 목격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11절).

이 구절은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그들과 동행하시면서 성경을 풀어 주시던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눅 24:13-35). 엘리야는 자신의 사역을 돌아보고 여러 면에서의 경험을 애기해 주었을 것입니다. 엘리야와 같은 스승과 함께 동행하며 말씀을 듣고 교제하는 일은 얼마나 귀하고 부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엘리사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온 정신을 쏟아 귀담아 들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엘리야가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설명할 때에 엘리사의 마음이 뜨거워졌을 것입니다(눅 24:32). 그렇다면 이제 엘리사는 엘리야가 떠나는 것을 볼 준비가 된 셈이었습니다.

 “불수레와 불말들이”(11절) 내려 온 때는 언제였습니까? 엘리사가 엘리야와 동행하며 깊은 교제를 나눌 때였습니다. 언제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엘리사가 “보고”(12절)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12절) 라고 외쳤습니까? 그가 엘리야와 단 둘이 계속 걸으면서 이야기 할 때가 아니었습니까? 엘리사는 자신이 보아야 할 것을 보았습니다. 이 경이로운 계시는 오직 그의 눈에만 보였습니다. 다른 선지자 생도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어느 산에나 골짜기에 내던지셨을지 모르니 오십 명의 수련생들을 보내어 찾도록 하자고 엘리사에게 간청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의 부질 없는 수색 작업은 실패로 끝났습니다(16-18절). 왜 이런 엉뚱한 짓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엘리야와 깊은 교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끝까지 하나님의 일에 투신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하늘의 실체를 보려는 결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하늘의 불수레와 불말들을 보여 주시지 않습니다. 계시의 그 순간은 오직 엘리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특권이 어떻게 엘리사에게 주어졌습니까?

우리는 속성과를 좋아합니다. 그냥 하늘에서 무엇이 뚝 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시계는 항상 빨리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계는 결정적인 최후의 때가 임할 때까지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갑니다.  복음은 장기전입니다. 엘리사가 어떤 과정을 거치고 하늘의 불병거와 불말들을 보았습니까? 그가 엘리야로부터 얼마나 많은 테스트를 받았습니까? 그는 매번 믿음과 충성으로 위기를 넘겨야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함께 끝까지 동행하는 매 과정의 신실을 통해서만이 하늘의 실체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은 도중에 멈추면 의미가 없습니다. 잘 달리다가도 끝까지 가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바울도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어디까지 와 있습니까? 우리들은 길갈에 머물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벧엘에서 그냥 살기를 원하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여리고에서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것은 아닙니까? 어쩌면 요단 강 앞에서 두려워서 뒤로 물러서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각 단계에서 머물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주십니다. 우리는 도중에 하차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이 주를 끝까지 따름으로써 오는 놀라운 축복들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체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억지로 끌고 다니시지 않습니다. 엘리야의 여러 제자들이 엘리사처럼 끝까지 따르지 않았을 때 그들을 강제로 이끌고 요단 강을 건너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요단 강을 건너고 안 건너는 것은 나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이 자유를 오용하면 하늘의 불말과 불병거를 보지 못합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죽음이 어떠할 것을 미리 알았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보면” 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만일 정상적인 죽음을 할 것이라면 그의 죽음을 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엘리사는 이미 엘리야와 함께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죽는 것은 정상적인 경우로 볼 때 엘리사가 보는 앞에서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평상적인 죽음을 보는 것을 엘리사가 성령의 능력을 받는 조건으로 내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적어도 자신의 죽음이 초자연적인 방법일 것을 알았고 그것은 곧 엘리사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는 사건일 것을 선지자의 통찰로 내다 보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자신의 데려감을 ‘보면’ 청원한 일이 성취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만약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온 시선을 집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지금까지 엘리야를 따랐던 여러 시련의 과정들이 열매를 맺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늘의 불말과 불병거는 주 예수께 온 마음과 온 시선을 쏟고 끝까지 주님 곁을 떠나지 않는 자들에게만 펼쳐지는 천상의 실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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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위클리

2015년 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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