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입덧과 요셉의 번민

(마태복음 1:18-25)  

어느 날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 천사가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에게는 이 좋은 소식이 커다란 비극의 원인이 될 뻔한 매우 황당한 사건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정혼한 사이였지만 동침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갑자기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셉이 놀라서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마리아가 요셉에게 애원하다시피 말합니다.

「요셉씨, 나 복숭아 먹고 싶어요. 어디 가서 좀 사 오세요.」

「무슨 소리요. 지금 이 겨울에 복숭아가 어디 있어요. 내년 여름에 많이 사다 주겠소.」

「아니예요. 지금 꼭 먹고 싶어요. 빨리 좀 구해 오세요.」

요셉이 이상해서 농담을 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마리아가 정색을 하며 요셉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말합니다.

「요셉씨, 나 임신했어요!」

그 후로 마리아의 입덧은 더욱 심해지고 요셉의 번민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마리아의 문제]

어느 날 뜻밖에도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기는 사람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눅 1:31-33, 35). 인류의 역사에서 천사로부터 이런 말을 직접 들은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처녀가 아이를 갖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남자가 없이 성령으로 수태를 한다는 것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마리아가 ‘주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문제는 그 이후부터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를 떠났습니다. 마리아는 앞으로  아무도 모르게 일어난 일을 오직 혼자서 감당해야 했습니다. 마리아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요셉이 관계를 끊으려고 작정한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자기를 버리면 사생아로 보일 수 밖에 없는 아기를 낳고 살아야 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가 성령 잉태의 소식을 전했을 때에 성경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가장 깊은 믿음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큰 믿음을 보일 때일수록 큰 시련이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로 하여금 누구도 믿지 못할 상황 속으로 들어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녀의 믿음의 고백을 테스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진심과 헌신의 깊이를 재어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큰 복을 내리실 때마다 큰 시련도 허락하십니다. 마리아는 믿음의 테스트를 통과하기 전에는 자신이 어느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맡겼는지를 확인할 수 없을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학자들의 짐작에 의하면 당시에 15-6세 정도의 틴에이저였습니다. 그녀는 날마다 불안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왜 자신이 그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를 하나님께 호소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평생동안  사람들의 입에 가십거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했던 유태인들은 예수님의 출생을 빗대어 말하기를 자기들은 ‘음란한 데서 나지 않았다’(요 8:41)고 했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모친이 음란한 짓을 해서 예수를 낳았다는 말입니다. 마리아와 예수님이 이런 모욕을 당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마리아는 메시아의 육신적 모친이 되는 인류 역사상 가장 놀랍고 경이로운 사건의 주인공으로 선택된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특권과 영광은 때때로 고통의 옷을 입고 옵니다. 크고 신령한 복일수록 고난의 잔을 들고 내게로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려고 할 때에는 나는 종종 어둠의 계곡을 통과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만삭의 몸으로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호적하러 가야 했습니다. 그녀는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마리아가 베들레헴까지 가서 출산을 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마리아는 무의식 중에  구주의 탄생지에 대한 예언을 성취시키는 신령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복음의 진리로 부르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축복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나 축복의 통로는 고난의 옷을 입고 고통의 잔을 마시면서 삽니다. 여기저기에 가시의 상처가 있고 고독한 삶의 아픔이 있습니다. 오해와 무시를 당하며 의로운 심령을 상하면서 삽니다. 복의 통로로 쓰임을 받는 자들은 주님이 가신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를 바라며 사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복을 내리시는 때가 옵니다. 그 때  우리들이 받는 무고한 비난과 오해들이 말끔히 사라질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찬가에서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눅 1:48)고 하였습니다.
[요셉의 문제]

요셉은 어떠했을까요? 마태복음 1장 18절에 보면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라고 했습니다. 임신을 한 후에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배가 나오려면 몇 달이 지나야 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마리아가 임신 초기에 입덧을 한 것을 가리킨 말로 보입니다. 요셉은 마리아로부터 깊은 배신감을 느끼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소리치며 괴로워했음직합니다. 그는 마리아를 사랑했지만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가진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번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셉은 큰 고민 끝에 마리아와 조용히 관계를 끊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성경은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어떻게 하는 사람입니까? 상대방의 허물을 드러내어 스캔들을 만들지 않습니다. 상대방에게 죄책이 있어도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고 배려합니다. 자신이 받는 고통을 상대방으로부터 보상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 관계는 좋았다가도 배신과 오해와 무관심으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의로운 사람은 분노하지 않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자신의 슬픔을 주님 앞에서 간직할 줄 압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주목할 사항이 있습니다. 요셉이 마리아를 의롭게 대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마 1:20). 하나님은 요셉의 마음을 읽고 계셨습니다. 요셉이 의로운 자의 모습을 보였을 때 마리아가 그에게 한 말이 사실인 것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 1:20).

요셉이 이 때처럼 놀란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마리아를 의심했던 일을 후회하고 회개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들에게 큰 복을 내리십니다. 요셉이 받은 복을 생각해 보십시오.

 

첫째, 요셉은 생전 처음으로 하나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난 체험을 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자주 있는 일이겠습니까? 성경 역사 전체에서도 꿈에 천사가 나타나는 것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성령 수태를 알린 천사는 가브리엘이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다니엘 선지자에게 나타나서 세상 역사에 대한 환상과 메시아에 대한 계시를 알려 주었던 천사였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의 부친이었던 사가랴 제사장에게도 나타났는데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눅 1:19)이라고 밝혔습니다. 가브리엘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마리아에게 왔었고 이제 요셉에게까지 나타났습니다. 요셉은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듣자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가장 슬픈 불행이 되었을 뻔했던 사건이 일순에 대축복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한 순간에 모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은 화가 변하여 복이 되게 하십니다. 재앙이 바뀌어 축복이 되게 하시고,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십니다(렘 32:42; 시 30:11).

 

둘째, 가브리엘 천사가 요셉에게 계시하신 메시지의 내용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이것은 마리아가 받았던 말씀과 동일합니다(눅 1:31).   마리아가 낳을 아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구약 시대부터 고대하던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요셉에게 메시아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상기켰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 1:23). 성경에는 동정녀 잉태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있었음에도 마리아의 말을 믿는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이 모든 설명을 듣고 확인을 받은 요셉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잠에서 깨자 마자 가브리엘 천사의 지시대로 즉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아니, 요셉의 아이가 아니라고 마리아가 고백했다는데 결혼까지 해 주고 그냥 데리고 살다니? 율법으로 하면 돌로 쳐 죽여도 당연할 텐데. 요셉이 아주 정신이 나간 모양이지. 남의 아이를 낳아서 어떻게 할려고….」

그러나 요셉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마리아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면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마리아도 요셉도 평생을 사람들의 가십거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결혼 전에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지고 예수를 낳은 부정한 여자로 간주되었습니다. 요셉은 그런 여자를 데리고 사는 한심한 남자로 취급되었을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오시게 하는 데 사용된 신령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스토리에 담긴 마리아와 요셉의 기사는 우리들이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는지를 역설합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의존하고 살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주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주님의 진리에 우리들의 생사를 걸고 살 때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자가 됩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타인의 눈이 나의 삶을 통제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크리스마스는 자유의 선포를 알리는 사건입니다. 우리들을 죄와 사망과 정죄와 허무에서 해방시키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들의 죄가 용서를 받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모든 형태의 속박과 불의에서 해방시키십니다. 주님은 의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내가 받는 불의나 오해나 무시나 부당한 고통들이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서 바로잡혀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오직 주님의 시선만 의식하고 살았던 마리아와 요셉을 하나님은 후히 갚아 주셨습니다. 세상에 눌리지 않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련을 통과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통해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이 되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롬 8:28).

 

이제 한 해를 마감해야 하는 끝 달입니다. ‘벌써!’ 라는 소리 없는 세월의 꼬리표가 우리들의 가슴에 서글픈 애상을 자아내며 얼마 남지 않은 끝 날들을 채우려고 가쁜 숨을 내쉬는 듯합니다. 세상은 말 없는 세월의 위력에 눌려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허망한 세월의 향방을 원망하며 기약 없는 새 해에 막연한 기대를 거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마지막 달에 비망록으로 적힌 붉은 글씨의 ‘임마누엘’ 이라는 신령한 메시지를 읽습니다. ‘주심의 오심’이 있었기에 우리들은 무상한 세월에 쓸려가지 않고 영원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허무한 시간의 의미를 사라지지 않는 영생의 참뜻으로 승화시키고 한 해의 끝을 주님의 임박한 재림의 소망에 접붙입니다.

오늘이라는 하루가 지나고 일년이라는 한 해가 떠날 때마다, 주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재림의 발걸음 소리가 더욱 가까이 들려옵니다. 예수님은 가시 면류관을 쓰시 골고다의 십자가로 가기 위해 아기 예수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주님께서 또다시 이 세상에 오실 때에는 만 왕의 왕으로서 영광의 면류관을 쓰고 만만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시며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들은 썩지 않을 새 몸을 받고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영겁을 호흡하며 영생을 마시면서 이 땅에서의 질고의 세월들을 모두 잊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같은 소망을 주신 주님을 다시 생각해 보는 한 해의 마지막은 우리들로 하여금 ‘벌써!’의 설음에 붙잡히지 않고, ‘마라나타’의 기대로 부풀게 합니다. 어둔 세상으로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로 가신 주님은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진리와 생명과 사랑의 빛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오심’을 믿는 우리들은 세월의 참 뜻을 압니다. 이 세상에서의 야속한 세월들일랑 흘러가게 하십시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의 새 생명은 인간의 죄로 물든 어둠의 세월을 이기고 왕으로 오신 주님과 함께 그의 찬란한 나라에서 영원히 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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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랜도 코리아 위클리

2014.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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