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쉽게 감동을 받으십니다.

 

“항상 선을 행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5-18).

 

교인들에게 한 가지 공통된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나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상 문제와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듯한 하나님의 뜻은 관심 밖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개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기 전에 성경에서 분명히 지적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공동체 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을 성경에서 명시해 놓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런저런 것이다 하고 시원하게 명목까지 대주었습니다. 즉, 항상 선을 행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언급한 하나님의 뜻은 선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도 신자들이 구원을 받은 목적은 선한 일을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크리스천 삶이라고 해서 슬픈 일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항상 기뻐해야 하는 까닭은 구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현실은 힘들지라도  크리스천은 영원한 십자가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성도들의 미래는 부활과 새 창조의 세계로 이어지기 때문에 항상 밝습니다. 이것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고 복음에서 약속된 진리입니다. 교인들에게는 이처럼 항상 기뻐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있습니다.

바울은 항상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모든 일을 제쳐두고 기도만 하라는 말일까요? 바울 자신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도 기도만 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기도의 소명을 받았을지라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회 생활을 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항상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삼상 12:23)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는 항상 기도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득죄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 말은 사무엘 선지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항상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기도를 쉬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기에 누구에게나 죄가 됩니다. 그런데 사무엘 선지자도 다른 일을 제쳐 놓고 기도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여러 가지 정상적인 활동을 하면서 쉬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럼 항상 기도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영적인 교제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기를 항상 간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개인의 필요를 위한 기도보다 우선입니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무분별하게 아무 데나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불의나 불행 자체를 감사할 수는 없습니다. 악한 일을 놓고 감사하는 것은 부도덕한  일입니다. ‘범사’라고 해서 죄까지도 감사의 영역에 포함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본 뜻을 무시하고 자신을 보호하거나 상대방을 누르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오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무성의한 일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하면 ‘만사에 감사하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들이미는 것입니다. 혹은 감당하기 힘든 불행을 당한 사람에게 ‘만사에 감사하라’고 했으니 슬퍼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오용은 하나님을 무정한 분으로 만들고 복음을 비인간적이고 불합리한 가르침으로 오해하게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모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는 성도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범사’라는 말은 불의를 당하고 여러 형태의 비극을 겪을 때에도 감사하라는 말로 적용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불행 자체를 좋은 것인 양 감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고난 자체를 찬양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이란 사실상 그런 고난과 여러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눈물도 죽음도, 애통도 질병도 다 사라지고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계 21:4). 그러나 우리는 화가 마침내 복이 되게 하시고, 슬픔이 춤이 되게 하시며,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섭리와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현실의 불행을 넘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시 30:11; 신 23:5; 느 13:2). 이런 의미에서 범사에 감사하는 자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롬 8:28).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을 때에는 그들이 박해를 받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범사에 감사하기는커녕 ‘범사’에 감사하지 못할 일이 더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고 역경 속에서 인내하며 주 예수를 닮아가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녀들을 항상 눈여겨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극히 작은 은혜를 입고도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만약 큰 은혜만 놓고 감사한다면 일생 동안 과연 몇 번이나 크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수천 명 앞에서 보잘것없는 오병이어를 손에 잡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면서 하나님께 크게 감사하셨습니다(요 6:11). 소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이 한 아이의 변변치 못한 도시락 하나를 받아 들고 하나님에게 깊이 감사하시는 모습이 못마땅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무심하신 분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신령한 아들이 그처럼 고생을 하시는데 왜 만나처럼 양식을 부어주시지 않고 초라하기 그지 없는 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손에 들고 기도하시게 하셨을까요?. 그러나 주님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시지 않고 대중 앞에서 하나님께 겸비한 감사를 올렸습니다. 이것이 오병이어가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는 기적이 일어나게 된 비결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우리 손에 놓아진 오병이어를 붙잡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시 9:1). 작은 것을 놓고 크게 감사할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큰 능력으로 임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들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축복들을 무시하지 않고 감사할 줄 아는 자들을 크게 돌보십니다.

 

룻이 어떻게 복을 받았습니까? 보아스의 밭에서 작은 이삭을 주우면서 감사했기 때문에 큰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룻이 주운 작은 이삭이 나중에 쌀 가마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녀가 허리를 굽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보잘것없는 이삭들을 줍고 보아스에게 크게 감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곡식의 주인인 부유한 보아스를 그녀의 남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으로 다윗과 그리스도가 나게 하신 것은 우리들이 잘 아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에게 이 같은 기적이 드물고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의 체험이 적은 까닭의 하나는 오병이어를 무시하고 깊이 감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물론 큰 은혜에 대해서도 크게 감사해야 합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들이 올리는 크고 작은 일에 대한 감사를 언제나 환영하시며 기뻐하십니다.

우리들의 감사가 주님을 감격하게 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것은 매우 놀라운 입니다. 주님은 쉽게 감동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감사에 감격하시며 감사하십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받았던 열 명의 나병환자들 중에서 단 한 사람만 예수께 돌아와서 감사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를 칭찬하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눅 17:19)고 공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이 큰 감동을 받으셨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와 같은 지극히 작은 존재가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사람들 사이에서도 감사하면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나에게 감사하는 사람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지고 가까워집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사랑의 관계에 필요한 요소들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우리들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께 감동을 안겨 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크고 작은 여러 일을 날마다 감사하고 감격해 보십시오. 감동을 모르는 신자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감사의 마음이 넘치지 않는 자들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는 삶을 살면 행복합니다. 주님은 항상 선을 택하고 기뻐하며 항상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은 고난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가장 행복하게 사셨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비록 인생살이의 고통이 있고 예기치 못한 불의의 사고가 있으며 가슴을 아프게 하는 슬픔이 있어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하늘 아버지께 우리의 필요를 알리고 그분의 돌보심을 의존해야 합니다. 그러나 효자는 자신의 필요보다 부모를 더 생각하는 법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행하는 희생과 사랑을 자식이 언급할 때에 부모는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을 대견히 여기고 자식에게 감사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느끼십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여러 은혜를 감사하고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리면 주께서 크게 감동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깊이 감사하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고 하나님의 감사까지 받는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주님과의 관계에서 선행과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삶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이 네 가지 요소는 순차적으로 보아도 상호 관련이 있습니다. 선을 행하면 기쁨이 옵니다. 선행을 했더니 마음이 불편하고 기분이 나쁘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항상 기도를 하면 항상 기쁨의 소재가 생깁니다. 선한 일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할수록 많은 응답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작은 감사로 주님을 쉽게 감동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심히 부족하여도 주님께 감동을 일으켜 드릴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기뻐하십시오. 주님으로부터 감사를 받는 체험을 위해 사십시오. 이것이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 올리는 감사로 인해서 나의 하루가 감격과 기쁨의 하루가 되게 하십시오. 주님은 쉽게 감동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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